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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선생 말년의 저작에 대한 온당한 접근

비평쟁이 괴리 2020. 9. 11. 16:27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원래 함께 기획되었던 글이 하나 더 있었다. 김현 선생의 시칠리아의 암소에 대한 연구로서, 이상길 교수가 철학의 복화술로서의 문학비평 김현의 푸코 연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불어불문학연구』 가을호(정확히는 123)에 발표하였다.

이상길 교수의 논문을 읽으며 비로소 선생의 말년 저작들에 대한 온당한 접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 그대로 기뻤다.’ 그는 김현의 폭력의 구조 르네 지라르 연구시칠리아의 암소(미셸 푸코 연구)에 대한 그동안의 논문들이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편향된 푸코 수용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 편향을 교정하기 위한 모색으로 글을 채우고 있다. 나는 그 글에 즉각 호응하여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보냈다.

 

이상길 교수님,

 

지난 번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지 않겠다고 하셨다길래 많이 아쉬웠습니다. 뭐, 논문으로 발표하셨으니 됐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동안 김현선생의 말년 행보를, 특히 지라르-푸코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풍토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는데, 이교수님이 적절히 교정해주신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문학은, 특히 김현 선생이 생각한 문학은,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80년 광주에 대한 반작용으로 읽더군요. 물론 그 역사적 비극에 김현 선생이 깊이 절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런 절망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폭력의 구조』와 『시칠리아의 암소』를 쓰도록 자극한 것도 사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문제는 폭력의 구조나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그 반작용의 굴곡은 아주 복잡하고 웅숭깊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일이구요.

이교수님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김현 선생에 대한 이런 편향적 해석은 푸코의 저작을 정치적 프레임안에서 읽어 온 한국의 푸코 수용 풍토에 힘입고 있는 게 또한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2000년에 연세대에 왔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푸코를 입에 떠올리는데, 그 푸코가 제가 읽은 푸코가 아니라서 매우 당혹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이교수님이 역시 제대로 방향을 잡았듯이, 푸코에게서 문학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제외한다면 푸코는 존재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처음부터 말이지요. 문학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말과 사물』이 어떻게 씌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김현 선생에게 푸코는 문학을 읽고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푸코였던 게 사실이지요.

또한 문학이 그냥 문학이 아니라는 것도, 이교수님은 잘 지적하고 계십니다. 문학을 즐기는 푸코에게서 청동 속의 소 울음을 떠올리는 문학은 그냥 문학이 아닌 것이 틀림없지요.

김현 선생이 외국 이론의 특정 부분들을 ‘피상적으로’ 건너뛰는 부분에 대한 지적도 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소홀함에서 김현식 수용방식을 읽는데, 그건 이교수님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문학이라는 조명등’의 기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현 선생이 생각한 ‘전복적 사유’를 고백과 연결시키고자 하셨던 점에 대해서는 제가 좀 의견이 다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교수님의 글이 계발적이라서 제가 다음에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어디에 발표해볼까 합니다. 이 교수님의 글이 아주 상쾌한 자극을 제공하였으니, 그에 대한 지적 주고받음의 한 양식을 실험해 보고 싶군요.

여하튼 저의 돌발적인 부탁에 기꺼이 응하시고 또 아주 내용이 알찬 소중한 논문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술 한 잔 같이 하기도 힘드네요. 제가 연구년이지만 어디 도망갈 데가 없어서(이윤영 교수는 일찌감치 제주도로 달아나는 기민함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냥 평일에는 학교에 나올 생각입니다.

어려운 비상시국에 잘 견디시기 바라고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뵙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명교 드림.

 

이상길 교수는 2018년에 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를 낸 적이 있었다. 아틀라스의 발 -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문학과지성사 간)가 그것이다. 이윤영 교수가 내게 사석에서 극찬하였듯이 한 지식인에 대한 이렇게 꼼꼼한 연구서는 한국 풍토에서는 보기가 힘든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식자들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내가 이런저런 데에 추천을 했을 때에도 그저 돌아온 건 무관심이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 지식인들이 서양 이론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현상 속에 도사린 기묘한 무의식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한국의 식자들이 서양 이론에 갈급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서둘러 유용한 개념들을 뽑아 내어 써먹기 위해서이지, 해당 이론의 발생과 생장의 역정, 더 나아가 그 이론을 만들어낸 이론가의 정신적 고행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른 써먹고 버리고 써먹고 버리는 것이다. 수년 단위로 끊임없이 이론 및 이론가들을 갈아치우는 소이이다. 요새는 랑시에르도 아감벤도 좀 뜸해졌으니 누가 또 그들의 갈증을 채워줄 것인가? 바디우는 아직 좀 살아있나? 언제 퇴장하시나?

이상길 교수는 그런 풍토에 대항해서 이론을 써먹을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으로 대하는 드문 지식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김현 선생이 문학을 정치에 복무시키려는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문학비평이 문학비평으로서 해야 할 일을 응시하기를 당부했던 것과 같은 줄기에 놓이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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