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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빛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 앉자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破精 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 - 고재종, 「장엄」(『그때 휘파람 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2001)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자기의 순수한 제시’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기 표현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저 순백의 치자꽃..
고형렬이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청하, 1988)를, 이영유가 『永宗섬길』(도서출판 한겨레, 1988)을 상자했다. 고형렬의 새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1985)에 실린 「백두산 안 간다」를 되새긴다. 반어적 제목의 그 시는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불온시되던 시대에, 통일이 이루어진 가상 상황을 설정해 백두산에 놀러가자는 친척들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현실의 상황을 통째로 뒤집어보는 파격적인 상상력에, 행복은 고통을 뚫고서야만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에 명령법의 강도를 부여하는 뱃심이 얹혀,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체제 내에 안주하는 향락에 대한 비판, 비현실적 환상에 대한 경고 등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복합적인 화음으..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네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문지혁의 『고잉 홈』(문학과지성사, 2024.03)은 두 가지 특징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미국 이민자, 혹은 미국 여행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물들은 정착한 이주민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이동 중인 상태에 있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있고, 버스 매표소 혹은 공항 근처에서 서성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서술이 아주 매끄럽다는 것이다. 서술의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의 심리는 풍경과 인상 사이의 날렵한 대응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여기에는 집요한 추구나 복잡한 사색은 없다. 대신 세상이 ..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네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자음과 모음, 2023.12)은 얼핏 보면 동화 같은 소설인데 자세히 읽으면 오늘날 서민들의 삶을 적절히 반영하는 ‘리얼한’ 이야기들을 기본 제재로 두고 있다. 이렇게 두 겹의 스크린을 겹쳐 놓는 까닭은, 현실에서의 일들이 이해가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인물들의 삶을 곤란하게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곤란함 이전엔 현실에 대한 무너진 환상, 즉 환멸들이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현실은 현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각종의 프레임을 양산해 왔으며 사람들은 그 프레임에 맞추어 세게를 해석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황인숙의 시들(『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은 탄성의 바닥을 싱싱하게 튀어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 팅!팅!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그는 세상의 깊이를 무시한다. 세상을 그는 미끄럼 지치거나, 고양이의 발을 가지고 사뿐사뿐 뛰고 쏘다니고 내닫는다. 말을 바꾸면 세상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해독(解讀)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분홍새’를 보았다해서 “무슨 은유인지, 상징인지” “갸우뚱 거릴”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그는 장난하듯 세상을 놀고 세상을 어린이의 상상 속에서처럼 자유롭게 변용한다. 그 장난이 얼마나 혈기방장한가 하면, “지구를 팽이처럼 / 돌리기. / 쉬운 일이다. / 사시나무 등어리건 초등학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