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2000)의 시 - 시 밑바닥에 깔린 자갈스런 느낌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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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2000)의 시 - 시 밑바닥에 깔린 자갈스런 느낌들

비평쟁이 괴리 2024. 5. 9. 08:58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빛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 앉자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破精 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  - 고재종, 「장엄」(『그때 휘파람 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2001)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자기의 순수한 제시’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기 표현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 그 몰린 중심”에서 자기로의 몰입이 시작되어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 청명청명”에서 완연한 ‘개화’를 만끽하다가 순간, “하늘로 열려선 /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 이 충만과 소멸 사이의 긴장을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신사임당 / 李奇善(내 어머니) / 한석봉의 어머니 某씨 / 柳寬順 / 잔다르크 / 클레오파트라 / 楊貴妃 / 크산티페 / 보다도 더 악랄한
女子(?)와 / 한 10년살다보니 거의 / 半병신,
骨病든사나이(♀)가 / 되어버렸다
[......]
이혼을 할까 자살을 할까 / 둘 중의 하나 개불알이다 / 雪山,苦行의 佛院처럼 / 熱考를 하다가,
그냥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살기로 했다.
[......]
그런 不可解한 / 어느 먼 나라에서 온 / 신비한 / 처참할만큼 아름다운 / 犯接할 수 없는 / 官能의 / 女人이겠거니 / 우리는 피차 서로에게 / 死僧習杖하는 꼴이겠지, 
[......]
그런데도 사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 / 發狂欲大叫, 조금은 정정당당하게 / 울었다,
나도 울 수 있는 인간 아니냐고 / 무척 슬프다는 듯이 으하하하 / 痛快하게 / 울었다. (김영승의 「瀕死의 聖者」(『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나남출판, 2001)

김영승은 자조를 아주 능글맞게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 능글맞은 태도는 그가 자조를 즐기기조차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교묘한 간지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이중적인데, 즉 그 자조를 바탕으로 시인을 비참케 하는 세상의 온갖 적들을 공격하며(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자들은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 동시에 적들의 공격을 통해서 그만큼 자신은 정신적인 높이를 획득한다는 것이다(악한 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항상 성자의 특권인 법). 물론 시의 재미는 그 태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능글맞은 태도에 상응하는 능청스런 말 재주이다. 이 타고난 시인은 개구(開口)와 발성 사이의 시간이 제로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그 능청스런 말재주는 그만큼 적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도 없애 버린다. 그의 적들에 대한 공격이 풍자가 아니라 해학으로 골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파괴되는 적의 파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공격적 풍자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하는데, 김영승의 천연덕스런 공격에는 그 거리가 존재하지 않아 그의 공격은 함께 견디는 수난이 되고, 그가 재주를 부려 낚아채려 한 정신적 품위는 함께 사는 자의 기묘한 비애로 바뀌는 것이다.

*

눈이 내린다 거세게 ,내 뺨에 부딪치고 않고 그 눈,그 바깥에 바깥에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지워질 듯, 도시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바깥은 이별보다 가깝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사랑이여 사랑이여 ,눈은 눈보다 가깝다 ,육체여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전시장과 전시장과 전시장과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공중전화 공중전화 공중전화 부스
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내 몸을 파묻지 않고 그 눈,그 바깥에 바깥에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말살하듯 ,네 육체가 육체가 육체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바깥에 바깥에 ,네가 있다 (김정환, 「사랑노래 2」, 『해가 뜨다』, 문학과지성사, 2000)

김정환이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여기는 부동의 심연이다. 언제나 콧김을 거칠게 내뿜는 철마였던 그의 시가, 육중해서 더욱 역동적이었던 그것의 움직임이 마침내 멈춘 것이다. 왜 멈추었는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시는 논리도 상황도 아니므로. 아니 논리 이전이고 상황 다음이거나, 상황 이전이고 논리 다음이므로. 중요한 것은 그가 철마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정지의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었다는 것이다. 보라, 그는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을 기어코 말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의 육체다. 그 육체가 정지하고 있다면, 육체의 반대말은 정신이 아니라, 정지한 육체 대신에 날렵히, 가볍게 춤추는 다른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雪)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바깥에서 날리는 눈이다. 왜 바깥인가? 자동차는 시방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는 눈의 화려한 "말살"로부터 보호되며, 더 나아가 무언가를 통해 여전히 움직인다. 그 움직이는 것, 그것은 바로 눈(眼)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바깥 너머를 응시하는 눈이다. 응시의 눈을 통해서 시인은 내 바깥의 눈 바깥의 '너'를 찾아낸다. 시의 제목이 「사랑노래」인 것은 그 때문이며, '자동차'와 함께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공중전화 부스는 물론 움직이지 못하는 자가 통화하는 비밀 통로이다. 이 시의 기본 대립은 눈/눈의 대결이며, 동음성이 마련한 긴장의 밀도로부터 추진력을 받아 사랑으로 진화하는 것이 이 시의 내부 서사이다. 그는 끝끝내 변증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
한 잎 꽃잎이 되어 떠가는 육신이 되어 구름과 지나는 버드나뭇가지 흐늘거리는 천을 보며
청량한 새소리 피를 울리며 종소리 종소리 들으며 떠가는 한 잎 꽃 잎이 되어가는
이 생도 거룩한 귀신이 걷는 흐르는 착란의 삶임을 이 차가운 물에 떠 알고 있으니

화려한 불빛을 툭 치며 이 잠바도 땀 흘리며 허이,허이,걸어가는 하 늘이야 이미 이승과 저승을
포기한 지 오래지만 마지막 미련 남아 있어 이 서늘한 심장을 어디에 놓아두어야 할지
화려한 비수의 눈동자는 하늘로 하늘로 올라간다오

계단을 밟으면 이미 꺾여진 나무 줄기처럼 접힌 하늘이 내 살 길이라고 알려주는 무덤 있어
우는 새는 이미 멀리 멀리 떠나 더이상 미련이 없다 나는
가고 오는 계절이 되나 흘러다니는 공기가 되나 흔적을 찾은들 무슨 비애가 물결치나(김태동,  「흐르는 꽃잎이여」, 『문학동네』, 1999 겨울호)



김태동은 점점 집단적 삶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라는 어사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참여는 동화(同化)가 아니다. 동화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집단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그가 집단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참여가 동화와 다른 또 하나는 동화가 주체의 신비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참여는 주체의 망실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고 오는 계절이 되나 흘러다니는 공기가 되나 흔적을 찾은들 무슨 비애가 물결치나"의 마지막 구절은 그 망실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주체는 망실의 과정 속에 있을 뿐 전적으로 망실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쓰기의 주체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주체는 육신의 해체를 겪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마지막 미련 남아 있어 이 서늘한 심장을 어디에 놓아두어야 할지"의 '서늘한 심장'이다. 그것은 그가 참여해 이루는 집단적 삶이 운명적 고난이기 때문이다. 참여는 주체만이 할 수 있는데 고난의 운명은 주체의 비주체화를 낳는다.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비주체화가 이성의 의지에 의해 실천된다면 남는 것은 가슴이되, 그러나 참여의 운동력은 그 가슴에도 작용하여 그 가슴을 서늘한 심장, 다시 말해 의지에 베임으로써 의지를 비추는 거울로 변형된 심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
비 내리는 시월 오후 / 붉게 타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 잿빛 건물을 휘감고 있다
일층 행복비디오 / 이층 카페 숲속의 빈터 / 삼층 건국기원 / 사층 소망교회
그을음도 내지 않고 타들어가는 벽에 매달려 / 담쟁이 넝쿨이 뿜어내는 불길한 불길
일층 유리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 작은 종소리 울려 퍼지고 / 담쟁이 넝쿨도 따라서 붉은 이파리를 혼든다
우산을 들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 뜨거운 기운에 놀라 한 번씩 하늘을 쳐다보고 / 그때마다 담쟁이 넝쿨은 더욱 붉은 화염을 / 허공으로 쏘아 올린다
오래 연옥의 시절을 맞아 /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 담쟁이 넝쿨 / 비를 맞아도 꺼지지 않는 불길이 / 슬프게 타오르고 있다 (남진우,  「화려한 유적」, 『타오르는 책』, 문학과지성사, 2000)

남진우의 시는 문명 사회에 대한 가장 화려한 조종(弔鐘)이다. 그는 문명 사회를 "오랜 연옥의 시절"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래다'는 것은 오래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오래 갈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오래 갈 연옥에 달라붙어 있는 게 항상 있는데, 이를테면 담쟁이 덩쿨이 그것이다. 그 덩쿨은 한편으로 문명의 연옥을 가리면서 동시에 문명사회의 연옥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문명에 기대어 사는 자연이며 동시에 문명을 추문으로 만드는 자연이다. 그 덩쿨의 실물은 무엇일까? 시가 바로 그것?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앙-----
갈매기 떼, 들, 들, 갈매기들 날고
타아앙-----.
어디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돌고래 한 마리도 꼬리에 걸리며
타아앙----
자기가 고래인 걸로 잠시 착각한 늙은
숫물개 한 마리도 옆구리에 치인다
타아앙-----
입 안에 가득 고이는 새우, 새우들,
타아앙------
나는 이미 바다이고 바다는 이미 나이다
타아앙-----.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
타아앙-----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고래가 아니다
타아앙------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바다도 아니다
타아앙------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아아앙·.
꼬리로 나를 치며 니아간다,
타아아아아아앙----- (박남철, 「고래의 항진」,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가"는 것은 분명 고래이다. 그 고래는 고래 아닌 것들을 마구 치면서 나아간다. 그때 "나는 이미 바다이고 바다는 이미 나다." 여기에서의 '나'는 고래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에 와서 나와 고래는 분리된다. 여기에서의 '나'는 화자이며, 화자로서의 '나'가 인물로서의 '나'로 돌변하였다.  인물로서의 '나'와 인물로서의 고래는 엄연히 다른 두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인물 '나'가 하는 말은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라는 나/고래의 분별의 거부이다. 앞에서 고래는 고래 아닌 것들을 마구 배제하면서 나아갔다. 다시 말해, 분별의 극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화자 '나'가 무대로 뛰어들자마자 '나'는 모든 분별을 거부한다. 고래가 분별을 집행하면서 양양히 과시한 그 힘을 그대로 빌어서 말이다. "타아앙...." 몰아치면서. 한데, 그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별의 거부가 실은 분별이다. 그것은 분별을 거부하는 것들은 모두 틀렸다고 윽박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하지 않는 것이 실은 분별하는 것이 아닌가? 잘 분별하는 것이 실은 분별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가? 이 시의 묘미는 이러한 인식론적인 물음을 각성 촉구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에 있다. 바로, '타아아아아앙...."하는 그 분별의 억센 힘을 그대로 실어서 말이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눈의 무게는 나무가 가진 갓맑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느티나무가 입은 저 흰옷이야말로 나무의 영혼이다
밤새 느티나무에 앉은 눈은 저음부를 담당한 악기이다 그때 잠깐 햇빛이 따뜻하다면 도레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도 보일 게다 (송재학, 「눈의 무게」, 『기억들』, 세계사, 2001)


송재학은  자주 정의를 한다. 그 정의는 학술적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을 하나의 주체로서 세워주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 마음 운동 주위에 깨달음이라는 인식론적 의미소, 겸손함이라는 도덕적 의미소가 붙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붙은 가장 중요한 전자(電子)는 상대방의 살아있는 육체를 느끼는 체감이라는 미학적 의미소이다. 그 체감이 눈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눈의 무게란 무엇인가? 그 가벼운 것이 그토록 낮은 소리를 낸다는 것. 다시 말해 눈은 절대로 높이 쌓이지 않고 깊이 쌓인다는 것, 그리고 따뜻하다는 것.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 /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신현림, 「아무 것도 아니었지」, 「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사, 2004)

아무 것도 아닐 때에, 아니, 아무 것도 아니려고 할 때에 부활이 시작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아니려고 하는 것은 낡은 생을 죽이고 다른 생을 준비하는 것이니까.


질기고 억센 잡풀들을 뜯어 먹고 사는 덩치 큰 짐승들은 필경 위가 여러 개다. 눈 지긋이 감고 앉아 씹고 또 씹고 삭히고 또 삭혀야 할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뚝에 묶인 염소처럼 평생 도회적 삶의 언저리를 맴돌던 봉두난발의 시인 이상은 대체 어쩌자고 그날 뜨겁디 뜨거운 매미 소리를 되새김질하는 황소의 권태, 그 살 두터운 혓바닥을 보게 된 걸까? 

옆으로 누운 여인들의 허리선을 빼어 닮은 길고 부드러운 구릉들 너머 지글대는 지평선을 망원렌즈로, 좀 길다싶게, 그리곤 모래바람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낙타를 짧게 클로즈업, 블라인드처럼 드라워진 길고 뻣뻣한 속눈썹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 화면을 정지시키고, 고딕으로, “너무 멀리 보는 낙타는 멀리 못 갑니다.”

20년 전이던가 10년 전이던가, 문득 자신을 낙타로 만들어버린 이 땅의 시인들이 질근질근 제 혓바닥을 씹으며 줄지어 반도를 가로지르던 시절이 있었다, 아득한 사막-신기루의 지평선 위에서 크고 작은 시인-낙타들이 단 하나의 권태-양식을 온갖 방언으로 직접 인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뱉어도 뱉어도 우리의 입 안을 그득 채워주는 은총의 모래알들이 있었다 그제였던가 어제였던가, 모래바람보다도 뜨겁게 우리의 가슴 속을 휩쓸고 지나가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노래방에만 가면 부르고 싶다, 아직도 (심재상, 「되새김위」, 『넌, 도돌이표다』, 문학과지성사, 2003)

한국의 지리를 호랑이도 토끼도 아니라, 낙타에 비유한 사람은 심재상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땅에서 신화와 환상을 보지 않고,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물론 역사 속의 한국인을 낙타로 비유한 사람으론 이미 황지우가 있었다.) 그 역사는 물론 고난의 역사인데, 또한 그것을 그냥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권태-양식의 역사라고 지칭한 사람도 심재상이 처음일 것이다. 왜 권태이고 왜 양식인지는 독자들이여 손수 궁리하시라. 그러면 이 낙타-한국 앞에 왜 카메라가 "자꾸만" 번쩍거리는 지도 알게 되리라.


급작스레 비가 왔다 양철 지붕 위에 찌그러져 얹혀 있던 해는 어느새 뭉개지고 잠자리 몇몇이 비행 고도를 한번 높였다가 낮추고 다시 높였다가 낮추더니 훌쩍 담을 넘었다 여자 아이 하나는 급히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남자 아이 하나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골목 끝에서 울며 솟구친 매미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다시 솟구치고 나뭇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유지하려고 빗줄기에게 부딪쳐 갔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이다 비가 오자 지붕은 더 미끄럽고 담장은 보다 두터워졌다 어느새 남자 아이도 쪼그리고 앉아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가는 길과 한 나무에서 문이 닫혀 있는 집으로 가는 길과 닫혀 있는 집에서 다시 나무로 돌아오는 길과 그 길에서 새가 떠난 새집으로 가는 길에 떨어지고 있는 비를 함께 보고 있다(오규원, 「골목과 아이」,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사, 2005)

언어와 형상 사이에 간극이 보이지 않는 이 분명한 사건, 설명의 말문이 그냥 개폐되는. 그런데 이 열리고 닫히는 찰나도 엄연한 시간성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길이이고 두께이다. 이 찰나를 통해 순수 형상은 뜻의 빈 항아리로 움푹 패인다. 이 시에서 두께의 찰나로 기능하는 것은 빗줄기이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뿐이다"의 빗줄기는 허공의 기둥이고 허공의 버티칼이다. 기둥이란 사원의 기둥, 즉 사원의 골격이니 그 기둥 때문에 저 그림이 보존되고(생각해보라, 비가 안 왔다면 저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겠는가), 버티칼이란 몰래 엿보는 도구이자 동시에 주체(이게 블라인드와 다른 점이다)이니, 저 빗줄기 때문에 보는 자는 보기만 하며 그가 보는 것은 모든 생이 젖는 광경이다.
*
꽃은 지는 꽃을 보며 지고
동박새 마주 보고 울다가
남쪽으로 귀를 세운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
섬과 섬 이어가다 잃어버린 이름
파도 속에 숨어 돌아오는 것을
낯선 집 기웃거리다 몰래 베낀 經
예송리 깻돌밭에 암호 남기며
모락모락 남쪽으로 떠나는 것을
서리 낀 외길 다시 맞닥뜨릴 때
내다 본 창이 곧 벽임을 절감할까
질문 또한 대답인 것을
슬며시 수평선 끌어당겨 입맞추면
지는 꽃 피는 꽃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이동백, 「보길도에 드러눕다」, 『현대시』 2000.02)

세 인물이 있다. 꽃(들), 동박새, 나. 꽃들은 줄줄이 지고, 동박새는 울며,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 이 세 인물을 하나로 잇는 동작이 있는데, 그것은 '보다'라는 동사이다. 그 셋을 가르는 것은 '보다' 이후의 행동이다. 꽃은 보고 지고, 동박새는 보고 울다가 귀를 세우고, 나는 보는 채로 그냥 있다. 꽃의 '보다'는 동일화를 유발하며, 동박새의 '보다'는 행동의 변화를 낳고, 나의 '보다'는 순수 동사이다. 꽃의 '보다'는 감염적이며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동박새의 '보다'는 인접적인데 왜 행동의 변화를 낳는 것일까를 물어야 한다. 왜 "남쪽으로 귀를 세"울까? 6행 건너 "모락모락 남쪽으로 떠나는 것을"을 읽었을 때에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무언가가, 아니, "잃어버린 이름"들이 남쪽으로 떠나고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이 복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모양이 "모락모락"이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남쪽으로의 움직임은 집단 이주의 움직임이다. 헌데 그 이름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은 그것이 섬이름들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섬과 섬 이어가다 잃어버린 이름"이란 "섬 이름을 하나하나 이어가다 잊어버렸다"는 뜻을 문자적 의미로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이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바다에 자욱히 깔린 섬들의 이어짐에 박탈과 유배의 분위기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보길도이리라.) 여기까지 오면, 꽃들이 무엇의 비유인지 드러나고, 그 꽃들이 섬으로 변환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꽃들 곧 섬들은 조선조 선비와 같은 유배자("내다본 창"이라는 언술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와 살 곳을 찾아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민중들(꽃들, 섬들의 복수성, 그것들의 이동이 암시하는)의 고난이 겹쳐진 특이한 이미지이다. 그걸 보고 동박새는 우는데, 나는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일까? "서리 낀 외길 다시 맞닥뜨릴 때/내다 본 창이 곧 벽임을 절감할까"를 읽으면 나의 '보고만 있음'이 무심히 보는 게 아니라 그 집단 망명 혹은 유배의 길이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에 그 까닭을 두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안타까이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상상 속에서 "슬며시 수평선 끌어당겨 입맞추"는 것 뿐. 그래서 지는 꽃이 피는 꽃으로 나비처럼 춤추기를 기원할 뿐. 그러나 그건 읽는 이를 얼마나 애틋하게 하는가.


모래주머니를 베고 누워 잠든다. 나의 귀에서 모래들이 쏟아져 나온다. 눈에서, 손가락에서, 잠의 문을 열고 자꾸 모래들이 쏟아진다. 어제 먹은 우동 가락이 아무리 내 목을 칭칭 감아도 입에서 쏟아지는 모래를 막을 길 없다. 나는 모래바람이 부는 이 언덕의 뜨거운 목구멍을 통과한다. 나는 여기 가장 많은 모래를 보태고 있다 나는 지금 가장 많은 모래를 죽이고 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길을 막던 모래주머니 한 덩어리가 내게 달려들고 있다.(이수명, 「모래주머니」, 『붉은 담장의 커브』, 민음사, 2001)

어떤 양식을 섭취하여도 나는 모래만을 분만한다. 내 잉태의 원천이 모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만은 사산이다. 그러나 모래는 본래 사막에서 서식하는 생명. 저절로 뜨겁게 달구어져 불모를 다산으로 바꾸려고 무섭게 달려든다. 오래 굶은 뚱보 마르고처럼.


생각의 수면도
위는 밝고아래는 어둡다
밑바닥에는 우렁이 기어간 길들이 여러 갈래로 나 있다
어구를 챙기며 어부가 물속을 들여다보면
수면을 거대한 잎들로 덮고도 사려 깊게 내다보는
늪의 푸른 눈

제 안의 꽃을 내헤쳐 보이고 싶은 늪은
어부 앞에서 망설인다
가시연마저 온몸의 가시로 제 몸을 찢고
수줍음을 불빛처럼 켜낸다
제 안에 있는 힘이 끊임없이
밑바닥을 차고 올라와서 펴는 생의
說明이 왜 저러할까

가시연의 거대한 바퀴를 돌리며
어부 김씨는 잠깐 뱃길을 낸다
그 걸 따라 그만이 아는 깊이까지
늪은 제 속을 둑둑 열어제켰다가
어부의 꿈이 걸어내려간 우렁이의 길까지
여전히 제 힘으로 꼭꼭, 다시 여민다 (이하석, 「늪」, 『녹』, 세계사, 2000)

이하석의 시는 묘사의 시이며 동시에 이야기 시다. 그는 사물의 단면을 떠서 그것을 체험의 방식으로 풀이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사물에서 생의 깊이를 인식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인식에 절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허드렛일, 잡역부도 무심히 해치울
일당과 근육만이 고려되는 그런 때가, 와버렸으면 아니 오겠는가
이 작고 반짝이고 심지어 날카로운 것이
그것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내 가슴속에서 뛰어오른다
부딪힐 내벽이나 높이를 잊게 만드는 데 충분한
그 약동, 푸우 ...... 하는 깊은 숨소리에 앞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
아 이 사람도 알고 있구나 내가 쉽지 않다는 거
한꺼번에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상념이 몰려오고
한순간 거세게 복받쳐올라 대체 무슨 감정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와중에도
공모의 음성, 덩굴장미의 암도 아래서 들이마신 일생의 심정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또르르 굴러다닌다 링거액같이 느리게, 어쩔 땐
토끼똥처럼 짧게 뚝
나를 마주보며 똑 채우라, 거듭 채우라, 이렇게 건너오는 말소리
몰입이 말을 안 듣고 빛이 깨지는 기운이 완연할수록
그 무념무상의 노동일은 쿵쿵거리며 뛰어온다
들여오는 하늘,
울리는 땅
마치 그것은 비탈처럼 급격히 떠오른다
비탈길 옆 비탈처럼
한방울 안에 한방울 안에,를 똑, 이 구슬소리
한마디 한마디 잠그려면
오 내 마음씩이나
내미음에펼요라니
직경이 같은 홈통끼리 서로 알아보는 것처럼
아무 형상도 그리지 않고
멍멍거리며,아 그들 (임후성, 「이 시간이면」)

"무념무상의 노동일"은 무엇인가? 무위(無爲)로서 노동하기. 나태(懶怠)를 가장 성실히 실천하기. 임금도 포기하고 성취감도 버리고 파괴의 검은 마음조차 없이 불수의적인 동작을 의지로 하는 것. 왜냐하면 필요한 인생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필요한 인생은 피로한 인생이니까.


너의 가느다란 녹색 줄기에서 /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목청이 쏟아지는지 / 수양버들은 하염없이 네게로 / 축축 늘어지기만 했고 / 햇빛은 소리에 닿는 순간 뜨겁게 타올랐다. / 공기는 그 소리에 흥건히 젖어 / 돌아다니며 모든 다른 사물들을 애무했으니
그 화려한 흥분의 현장에서 / 나는 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고 / 증발하는 물보다 더 가볍게 떠올랐다
[......]
‘수련’이란 글자를 아는 것은 / 너를 아는 것이 아니다. / ‘6월과 8월에 걸쳐 꽃이 피는 / 수련과의 다년생 수생 식물’이라는 지도가 / 너에게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 처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
내가 모르는 그 깊이에서부터 / 너는 흰 꽃잎들을 분만한다, / 너의 얼굴 아래 물속에 잠긴 / 그 육체를 나는 영원히 바라볼 수도 없다.
[......]
너무나 분명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 수련, 너를 백지 위에 옮기려면 / 너를 죽여야만 한다. / 너를 내 시선의 밝은 빛 속에 / 아름답게 가둘 수 있는 것은 / 겨우 사흘뿐— 세 번의 밤에 / 세 번 꽃봉오리를 닫는 순간 / 너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 
한여름 계절의 한창때, / 한낮의 꽃인 수련이여! / 꿈이 베일처럼 너의 나체를 가리고 있는 / 수련이여! 
너를 갖기 위해선 / 글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채호기 「수련」, 『수련』, 문학과지성사, 2002)

우리가 인간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인간의 음험한 용도에 의하여, 그것이 실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규정한 타자의 의미를 배제했을 때, 그 타자가 인간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그 순수 타자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물감이든 까닭 모를 쾌감이든 다른 존재가 주는, 공기가 나르는, 강렬한 느낌만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 앞에 선 나는 "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고/증발하는 물보다 더 가볍게 떠올"라 그저 지나치게 과잉되거나 지나치게 결핍될 뿐 어떤 의미도, 다시 말해 어떤 통화의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존재 이유는 거기에서 피어나는 법이니, 원래 그것의 용도였던 의미의 수레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무의미의 현존을 증거하고 지속시킬 유일한 방법론으로서의 언어가 그 존재 이유인 것이다. 상처도 두께도 없는 "건조한 검은 흔적"인 글자가 무수히 되풀이되는 의미 부여의 실패로 무덤을 이룰 때 타자는, 다시 되풀이하지만 그게 사물이든 인간이든, 저의 인간적 의미를 넘어, 그것의 적나라한 나체성을 뚫고, 무한한 상상의 지평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 "꿈이 베일처럼 너의 나체를 가리고 있는/수련이여!//너를 갖기 위해선/글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


녹음이 짙어가는
광릉 소리봉에서
넋 놓고 꿈꾸듯이
크낙새를 기다린다
새라면 마땅히
깃들이고 싶을 만큼 우람한
참나무 밑둥에 기대앉아

까만 옷에 붉은 모자
크낙새가 나타나
온 숲을 목탁소리로
쟁쟁히 울리기를 기다린다
광릉 숲에서 아니 지상에서
거의 영원히 사라졌으리라는
추정을 외면한 채

오지 않을 줄 번연히 아는
애인을 기다리듯
기다림을 통해
사랑을 완성시키겠다는
어리숙한 순정으로
광릉 숲이 광릉 숲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최두석 「광릉 숲에서」,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사, 2003)

크낙새의 나무 쪼는 소리가 목탁 소리임을 처음 알았다. 목탁 소리가 나무 쪼는 소리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리숙한 순정으로/광릉 숲이 광릉 숲으로/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를 읽었을 때 나는 마침내 깨달았던 것이다.



줄달음쳐 오는 가을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조금 더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가 빠르게 머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산굽이를 돌고 완만하게 경사진 들을 지나자 옛날 지명 같은 부추 마을이 나오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 모습이 보이고
가랑잎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립니다 물이고 가랑잎이고 가을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산속의 짐승들도 오늘은 그들의 겨울을 생각하며 골짜기를 빠져 나와 오솔길을 가로질러 달립니다
가을은 우리 밖에서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우리는 안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비명처럼 있습니다(최하림 「가을의 속도」, 『최하림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2010)

가을에서 낭만을 찾지 말라. 높은 하늘도 살찐 말도 없는 세상이다. 서점은 쓰레기장이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가을도 온 듯하면 벌써 갔다. 이런 세상에서 가을은 가을이 아니라 입동이다. 온갖 생명을 삽시간에 겨울 속으로 삼키면서 스스로 경악하는 아가리이다.



4
어머니 , 왜 냉장고 안에 계세요?
천천히 상하기 위해서란다
너는, 오래오래 나를 먹을 거잖니?

꽃의 웅크림 속에는 다른 광막함이 있다 사람들은 그 땅을 찾아가 죽는다 세계는 수와 상징을 향한, 그리고 열정으로 이루어졌다고, 적는다

5
아버지 왜, 이러세요? 잠시 그 고장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완전한 침묵 속에 던져졌던 것이지요 소금 구덩이에 얼굴을 묻고 질식해 죽어가는 염소처럼, 내 몸으로부터 그 강가의 비린내가 흘러들어가는 물속의 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그 죽음 속에서 건져 올렸을 때 나는 물고기처럼 울었지요 기묘한 상실감이었으나-- 아직 피지도 않은 벚꽃에 마음은 취해 갈피를 잃어 나, 횡설수설하며 해군 사관학교 부근을 서성이다 새벽 목욕탕에서 잠든다 기차는 멀고 버스는 가깝다 웬 성당이 헛묘처럼 성가신 부재를 파묻고 있다 간절한 기도소리가 봄 바다를 헤엄쳐간다 모두 행복하라, 모든 고통과 함께 (함성호, 「고요한 재난」제 4,5부, 『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사, 2001)

살륙이 풍경이 된 시대. 때로는 광경(spectacle)이고 때로는 주마등(panoroama)인 시대. 이런 시대에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 함성호는 이 살륙-풍경을 내삽의 글쓰기를 택한다. "어머니, 왜 냉장고 안에 계세요?/천천히 상하기 위해서란다/너는, 오래오래 나를 먹을 거잖니?"가 그 내삽의 가장 깊은 곳이다. 살육되는 진실을 살해자의 행동 한 복판 안에, 그 톱니바퀴로 삽입하는 일! 이 시의 언어가 편지와 묘사와 기록과 탐구로 마구 뒤엉켜 있는 것은 그 내삽을 실천하기 위해서 불가피했으리라.

여울 바닥에 갈앉아 살이 삭은 가랑잎 한닢. 여린 그 물엽맥을
흔들며 파란 하늘과 하나가 되어 버린 고추잠자리의 눈부신 잠적.

빈 손이 잡고 있었던 것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었던 금빛 잠
자리 날개가 흔적처럼 남긴 갈잎 서걱이는 소리였다.

바람의 그늘이 바람을 앞서서 들길처럼 흐르기 시작할 때 손은
윤곽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바람은 바닷가 앙
당그러진 외딴 헛간 같은 내 몸을 무시로 드나들고 있다.

한때 캄캄한 사랑의 살을 용암처럼 더듬었던 손. 지금 내 손이
거머쥐고 있는 것은 저무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솟대 끝에서 일
렁이고 있는 밤의 그늘이다. 별자리 뒤켠에서 조용히 피 흘리고
있는 시원의 어둠이다. (허만하 「손」


그의 시 답지 않게 첫 두 연까지는 추억이 있고 여운이 감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여운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서 급속도로 폐허의 광풍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격렬한 결핍이 읽는 자의 뼈마디를 들쑤시고 "지금은" 잦아든다. 격렬한 결핍이 다시 결핍되는 것. 결여의 결여가 불안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런데 여기에서 결여의 결여는 그게 아니라 의지이다. 폐허의 잔해들이 새 생을 위해 "일렁이는" 것 말이다.


어둠이 온다.
달이 떠오르지 않아도
물소리가 바다가 된다
밤새가 울만큼 울다 만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
생선들 누웠던 평상 위
흥건한 소리마당 같은 비릿함,
그 냄새가 바로 우리가 처음 삶에,
삶에 저도모르게 빠져든 자리!
그 냄새 속에 온폼 삭듯 젖어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또 새 설렘!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사람을 지나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싶다.(황동규, 「소유언시」, 제 8부,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발견의 시에서 깨우침의 시로! 인식의 시에서 반추의 시로. 왠 일인가? 이 영원한 방랑자가 세계 방방 곡곡에서 타인이 아닌 자기를 보고 있다. 새로움이 아닌 과거를 보고 있다. 제 생의 아주 먼 뿌리를 들여다 보고 있다. “육십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잊어버”리는 일의 희한한 역설 속에서! 거기서 다시 “멈출 길 없는 떠남”을 느끼면서. 육십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돌이키면서.

*

부엌에 서서 창밖을 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오늘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
그리고 봄 기운을 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 것이다.( 황인숙 「조용한 이웃」,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

나도 얇게 저민 햇살을 씹어보고 싶다. 그러려면 저 나무들처럼 공중부양을 해야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