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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덫이더라 - 황인숙의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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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덫이더라 - 황인숙의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비평쟁이 괴리 2024. 4. 18. 14:17

황인숙의 시들(『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은 탄성의 바닥을 싱싱하게 튀어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 팅!팅!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그는 세상의 깊이를 무시한다. 세상을 그는 미끄럼 지치거나, 고양이의 발을 가지고 사뿐사뿐 뛰고 쏘다니고 내닫는다. 말을 바꾸면 세상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해독(解讀)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분홍새’를 보았다해서 “무슨 은유인지, 상징인지” “갸우뚱 거릴”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그는 장난하듯 세상을 놀고 세상을 어린이의 상상 속에서처럼 자유롭게 변용한다.
그 장난이 얼마나 혈기방장한가 하면, “지구를 팽이처럼 / 돌리기. / 쉬운 일이다. / 사시나무 등어리건 초등학교의 철봉대건 / 세종문화회관 기둥뿌리건 / 이 낡은 지구의 굴대를 붙들고 / 대여섯 바퀴만 돌라. / 좀 빡빡히 안 돌아간다면 / 다시 대여섯바귀를. / 오, 수천의 뻐꾸기가 머리 위를 날 것이다”(「당신들의 문제아」)라는 식이며, 그 장난에 의한 세상이 변화가 얼마나 자유롭고 천연스러운가는 소낙비를 만나 집으로 뛰어 돌아가는 모습을 “와, 와, 나는 / 헤엄쳐서 돌아왔네. / 풀섶을 나뭇가질 / 수초처럼 헤치고”(「산책」)라고, 바다 속의 헤엄으로 묘사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깊이를, 그러니까 뿌리를 무시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불량하다. 뿌리를 무시하는 자는, 전통을, 세대를,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역사를 무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몸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치고 달아난다. 그의 시들에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전도된 시선들은 그래서 생긴다. 그러나 자세히 보라. 그는 불량한 게 아니라 불량함을 꾀한다. 그는 “하느님, 시험에 들게 하오소서. / 조그마한 미끼라도 저는 물겠나이다”(「기도」)라며 노골적으로 신성을 조롱하려고 든다.
이 지나친 과시 속에는 상투화된 삶에 대한 반란의 욕구가 꿈틀거린다. 그러나 그의 시들이 낳는 문학적 효과는 반란의 욕구를 부추기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한편으론 상투화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그 반란의 행위 자체가 상투화되는 현상을 고통스럽게 성찰하는 데에 있다.
상투화된 삶이란 아마도 낡아 생기를 잃고 썩어가는 삶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낡은 것은 곧 무너지고 부서질 위험에 처한다. 썩는 것은 더럽게 질척거린다. 하지만 부서지고 썩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서지는 건 / 아름답다 / 부서져 눈부신 / 별, 별빛들”(「믿지 못하여」) 같은 구절을 보라. 또한 썩은 것은 거름이 되어 다른 생명들의 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부서지지도 썩지도 않고 한결같은 그 상태로 하염없이 계속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낡음과 부패를 제조된 희망으로 도배하여 그 진행을 악착같이 막으며 살기 때문이다. 이 상투성에 대한 희망은 매우 유동적인 세상을 닫단히 굳은 것으로 믿고(믿고 싶어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살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의식-욕망 속에서 제조된다. 그 의식-욕망은 완강한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끝없는 생각의 변화를 시도하고, 주어진 세상에 대한 수동적 용인 속에서 자기 발전을 꾀하는 욕망이다.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홀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의 개인주의에 대한 그의 놀라운 통찰은 이런 과격한 시구를 낳기도 한다: “오, 집어치우자. 갈참나무를, / 단풍나무를, 오동나무를. / 우리가 어느 나무의 몸을 통해 나온 욕망인가를 / 욕망이면 욕망이었지, 집어치우자”(「복받을진저, 진정한 나무의」). 욕망에서 갈참이며, 단풍이며, 오동 등의 개별성을 지우는 것은 욕망의 자기중심성을 제거하려는 의도에 다름아니다. 대신, 시인은 욕망의 행위에 집중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존재로 이행하려 한다. 한데, 어떤 존재로?
시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욕망에서 개별성들을 제거하자 그것은 무차별적이 되어 어떤 곳으로 이행하든 새로움의 의미를 제공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의 행위는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어떤 방향성도 가지지 못한다. 욕망은 무한히 공회전한다. 그래서 욕망은 부단히 변형되려는 운동으로서 화석화된다. 황인숙의 시가 거듭 고뇌하는 것은 바로 그 상황이다. 
황인숙 시의 싱싱함이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적 욕망을 등치는 데서 나온다면, 그 씽씽함 뒤에는 자유가 덫이라는 발견술적인 고뇌가 있다. 그는 고양이의 탈을 쓴 붉은 지네이다. ( 『한국일보』1988.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