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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하다 - 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순수의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하다 - 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

비평쟁이 괴리 2024. 4. 25. 18:49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네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자음과 모음, 2023.12)은 얼핏 보면 동화 같은 소설인데 자세히 읽으면 오늘날 서민들의 삶을 적절히 반영하는 ‘리얼한’ 이야기들을 기본 제재로 두고 있다. 
이렇게 두 겹의 스크린을 겹쳐 놓는 까닭은, 현실에서의 일들이 이해가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인물들의 삶을 곤란하게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곤란함 이전엔 현실에 대한 무너진 환상, 즉 환멸들이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현실은 현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각종의 프레임을 양산해 왔으며 사람들은 그 프레임에 맞추어 세게를 해석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그 프레임이란 이를테면 미적 취향이나 미각, 동물을 바라보는 눈, 남녀‧노소‧흑백‧지역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 등등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데, 그것들은 세상에 넘쳐나는 각종 매체를 타고 급격히 균질화된다. 그래서 반려동물은 누구나 귀엽게 여기게 되고 사람의 외모를 판별하는 기준이 획일화되고, 유명 셰프가 요리한 음식만이 맛있으며, 약간의 계산을 하면 집을 살 수 있고, 집 장만을 위해서는 당분간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이 뿌리내리게 된다. 
문제는 그런 프레임이 대량으로 제공되는 데도 불구하고 현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것. 상사의 권유에 따라 초대권을 사용했더니 고발을 당해서 성공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심지어 그 프레임이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노숙자에게 애써 음식을 제공했더니, 음식이 맛없다는 불평을 듣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며 사과를 요구당하기도 한다. 
더 큰 혼란은 이런 혼란스런 세상에서 어김없이 성공하는 사람들은 출현하여 그의 출세를 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방향을 알 수 없는 추처럼 움직이는 현실의 돌주먹에 얻어터진 서민들은 억울함 이전에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기준점을 잡아 보는 게 당장 눈에 띄는 수단이다. 저 프레임들과는 다른 기준점을 말이다. 기준점의 설정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그려놓고 거기에 준해서 현실을 평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적 상태가 정말 믿을만한 것인지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주 다양한 방법적 도구들이 제출되지만 논란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사태는 그런 방법적 도구들도 갖추지 못한 채로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 상태를 무조건적으로 맹종하는 경우인데, 현실은 그런 경우들로 넘쳐나서 해결책도 없이 ‘박 터지는’ 싸움이 매일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프레임이 소위 ‘과학’과 ‘진실’의 이름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이는 프랑스의 교양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3월 28일 자 특집 제목이다), 하는 회의가 시시때때로 고개를 드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향은 프레임 보유 이전의 순수의 상태로 회귀하여 그에 근거해 현실을 가늠하는 것이다. 흔히 동화가 그런 방법을 취하는데, 그러나 동화는 그 방식에 골몰하여 현실과의 접촉을 기도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순수’를 즐기면서 어린이들에게 생의 원기소를 주려고 한다. 『래빗 인 더 홀』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런 ‘순수 상태의 기준’을 현실의 상황에 겹쳐 놓음으로써 현실을 이해하는 가늠자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 서면, 현실의 이 혼란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점차로 빠져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 빈번히 어딘가 망가진 상태, 더러워진 모습, 컴컴한 어둠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실이 명료히 파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 상태’라는 가정은 실제론 명백한 허구에 불과해서 현실에 개입하는 통로를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로부터 퇴화한 상태로서 ‘순수’의 모습을 제시한다. 가령 눈이 멀거나, 매일 과제 설정이라는 유년기의 훈련 상태로 돌아가거나, 동물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방식은 이른바 ‘정상’과 ‘위용’을 자랑하는 현실로부터 베제되거나 박탈된 상태로 인물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현실의 더러움을 폭로하는 데 유용한 효력을 가진다. 게다가 이는 현실을 규정하는 온갖 프레임들을 걷어내는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건 현실을 순수한 체험을 통해서 현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그러나 실제로 ‘순수한 체험’이란 없다. 어떤 체험들도 시시각각의 해석틀과 그것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해석틀의 수립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겪어지는 것이고 혹은 그런 과정을 생성하는 절차이다. 
우리가 잘 아는 외디푸스의 실명은 인간 사회의 시작이지 종말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이 가정하는 순수 상태가 그 자체로서 독특한 소설적 면모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한복판에서 ‘더렵혀지는’ 양상으로 재형성될 때 현실과의 박진한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권유도 덧붙인다. 실로 현실의 가장 참된 기준점은 현실 그 자체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에 어둠의 장막처럼 드리워진 프레임들의 그물망 속에 외양적으로 통합되어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 그물망을 찢어버릴 수 있는 가시의 씨앗을 거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