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시적 현실주의의 두 모습, 반어적 악마성과 참여적 도피주의 -고형렬의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와 이영유의 『영종섬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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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실주의의 두 모습, 반어적 악마성과 참여적 도피주의 -고형렬의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와 이영유의 『영종섬길』

비평쟁이 괴리 2024. 5. 3. 10:09

고형렬이 『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청하, 1988)를, 이영유가 『永宗섬길』(도서출판 한겨레, 1988)을 상자했다. 고형렬의 새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1985)에 실린 「백두산 안 간다」를 되새긴다. 반어적 제목의 그 시는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불온시되던 시대에, 통일이 이루어진 가상 상황을 설정해 백두산에 놀러가자는 친척들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현실의 상황을 통째로 뒤집어보는 파격적인 상상력에, 행복은 고통을 뚫고서야만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에 명령법의 강도를 부여하는 뱃심이 얹혀,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체제 내에 안주하는 향락에 대한 비판, 비현실적 환상에 대한 경고 등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복합적인 화음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고형렬 시의 중요한 구성원리 중의 하나인 이 반어적 상상력과 뱃심의 결합에 대해 시인 자신은 “물살에 안기는 그물을 / 상상과 심줄로 후려 올릴 때 / 함께 잠겨 있던 빛만이 / 무거운 물 속에서 건져진다”고 진술한 적이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그것들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되풀이되는 게 아니라 모종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무슨 변화냐 하면, “빛만이 건져”지지 않고, 현실의 고통과 빛이 한덩어리로 뒤엉켜 칙칙하고 번들거리며, 격렬하고 쓸쓸하며, 시커멓고 훤한 공간을 키워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상상’은 현실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이길 넘어서서, 상상세계의 빛을 모아 현실의 표면을 태우고 지지는 볼록거울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심줄’은 그의 시들을 “힘찬 서정”(閔暎의 평)이 되게끔 하던 탄력을 버리고, “파르륵파르륵 꼬여지는 새끼줄”로 뒤틀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시인의 눈이 더욱 고통의, 혹은 원한의 뿌리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러나 그의 새끼줄의 형상과 또한 무궁무변으로 휘어감긴 고통-원한의 칡덩굴 같은 세계의 모습이 하나라는 걸 간파한 독자라면, 그 새끼줄은 세계라는 악과 드잡이하기 위해 그 악을 제 몸에 품어버린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심줄-새끼줄은 실은 저주와 욕설의 “쌍(!) 꽃창”으로 변신하기 위해 그렇게 몸을 비트는 것이다. 현실주의적 악마주의란 이런 시세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영유의 시적 공간은 가벼운 현실풍자가 무거운 우울을 뒤에 감추고 있는 공간이다. 진형준이 “우수와 야유”라고 명명한 그 공간의 우수는 현실을 구속의 형식으로 통제하는 법의 지배와 그 법에 갇혀 구속을 수락한 대가로 “무어든지 제것 삼아 하나씩 / 하나씩 꿰차”는 사람들의 욕망에 “숨이 막혀 / 널부러진” 반성인의 우울인데, 그 반성인의 ‘야유’, 아니 ‘야지’는 법과 욕망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딴짓거리”를 하는 걸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딴짓거리는 현실도피가 아니다. 그의 시는 참여를 강요하는 시대에 형식적인 참여(동반)로써 실제적인 불참을 실행함으로써, 법의 지배를 시종 허탈하게 만드려고 하는 현실적 도피주의이다. 그의 시구 하나를 빌자면 그건 “모든 굴욕을 웃음으로 깨달은 /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하다. 「인사」는 그 무거움의 한 복판에서 가벼움이 솟아나는 과정을 뛰어나게 형상화한 시편이다. (발표: 『동아일보』1988.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