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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윤리학 - 폴 리쾨르의 『악의 상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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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윤리학 - 폴 리쾨르의 『악의 상징』

비평쟁이 괴리 2023. 10. 29. 17:05

『악의 상징』(양명수 역, 문학과지성사, 1994)은 악마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을 위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인간의 악 체험에 대한 인간에 의한 교정을 둘러싼 인간의 사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악은 악에 대한 사유이다. 그 사정이 “악이 아무리 뿌리깊다 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는 않다”는 말에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악의 상징’은 때문에 『의지의 철학』에 속한다. 악은 선에 속한다. 리쾨르의 악학은 악의 치유학이다. 그의 존재론은 윤리학과 한덩어리로 움직인다.
악은 미토스로부터 로고스로 향한다. 그 처음에 잘못이 있다면 그 끝에 자유가 있으며, 그 처음과 끝을 잇는 도관을 말이 흐른다. 로고스란 곧 말씀이니, 처음과 끝에 이르는 전 길이에 로고스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리쾨르의 윤리학은 이성중심주의로부터 멀지 않다. 그러나, 그리도 가깝게 보이는 그곳에 급격한 벼랑이 있다.
우선, 흠과 죄와 허물이라는 악의 성층들 사이에 오르막 계단이 놓이지 않고 순환의 고리가 둥그렇게 그려진다. 흠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얼룩이지만 이미 그 안에 상징이 새겨져 있다. 흠이 흠이라고 말해지려면, “흠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흠”인 때문이다. 그러니, 흠 속에 이미 허물이 있다. 마찬가지로 허물은, ‘포로된 자유’가 그러하듯이, 그 스스로 결코 생각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흠과 죄 체험을 구성하는 상징 언어들을 자기 식으로 다시 취”함으로써만 파악된다. 이렇게 “상징들 사이에는 순환 관계가 있다. 나중에 생긴 상징들은 그 앞의 상징들로부터 의미를 취하고 뒷 것들은 앞의 것에 그 상징력을 전달한다.”
이성중심주의의 극단에는 언제나 완고한 절대성이 저 너머에 엄존하고 있다. 그것이 위로 향하면 공포를 낳고 아래로 향하면 금제를 낳는다. 리쾨르적 순환론은 그 너머의 그것을 이곳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로부터 공포와 금제가 아니라, 대화와 요청의 윤리학이 발생한다.
다음, 그로부터, 신(절대성)과 인간 사이에 계약이 수립되며, 하나님의 무한한 요청과 유한한 계명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 신학은 윤리학으로 흐르며, 그 윤리학은 신의 요청을 요청하는, 그래서, 신과의 계약관계를 확장되고 깊어지게 하는 자유인의 의지로 움직인다. 인간은 신을 매개한 그 자신의 의지를 통해 악으로부터 구원으로 열려나간다. 리쾨르의 로고스는, 반성하는 로고스, 스스로를 여는 로고스이다. 자유는 밖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그 자신의 소유도 아니라, 오로지 변모하는 그 자신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말이 이야기임을 말해야겠다. 말씀이지만 또한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말은 이야기가 됨으로써 다양해지고 무한해지고 평등해지고 사건들로 풍요해지면서 역사를 이룬다. 말이 말씀일 때 그것은 가리키고 쏘고 울리며, 이야기일 때 그것은 넝쿨처럼 확장되고 깊어진다. 그 이야기, 즉 말들의 강에 인간이 어떻게 악을 인식하고 의미화하고 극복하여 자유의 공간을 확대시켰는지의 내력이 고스란히 깃든다.
번역은 섬세하고도 정확하다. 한국 기독교 언어를 체득하고 있는 역자는 흠․죄․허물 등의 기본 개념으로부터 체언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적절한 우리말을 찾아냄으로써, 서구철학자의 까다로운 사유체계를 한국어로 이루어진 사유의 틀로 뛰어나게 변환시켰다. 번역은 말의 바른 의미에서 주석이고, 주석이란 곧 창조적 해석에 다름 아니다. 번역은 비평의 상징을 이룬다. 혹은 거꾸로이다. 
󰏔 1994. 4. 25, 도서신문, 인간의 ‘악 체험’ 의지의 철학으로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