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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성복의 새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를 읽으니, 그의 시는 아주 깊은 우물을 파서 지구의 내핵에 이른 후 더 이상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할 여지가 소멸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자벌레가 파먹은 어떤 눈은 옹이같다 눈물은 빗물처럼 밖에서 흘러든다 기어코 울려면 못 울 것도 없지만 고성능 양수기가 필요하리라(「눈에 대한 각서」, 부분) 그의 눈이 ‘옹이’이고, 아예 그의 육체가 옹이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8)에서 그는 ‘말’을 건너 ‘침묵’의 세계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육체가 진저리치는 광경”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제 그는 저 육체의 버둥거림이 남긴 적막 속에 스스로 유폐된 듯하다. “흐릿한 눈”을 뜨고. 내가 밥 먹으로 다니는 강가 부산집 뒤안에 한참을 ..
구효서의 『동주』(자음과 모음, 2011)는 오랫동안 윤동주에게 씌어졌던 상투적인 이미지를 벗겨버리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요컨대 작가에 의하면 윤동주는 ‘민족시인’이라기보다, ‘세계시민’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조선인이 됨으로써 세계인이 되기 위해 깊이 고뇌한 사람이다. 그런 윤동주를 작가는 ‘언어’에 근거해서 상정할 수 있었는데, 즉, 그의 모어는 조선어이지만, 그가 익힌 언어는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라는 것이다. 언어가 정신의 거처라는 생각은 꽤 설득력 있는 생각이며, 이에 근거해서, 작가는 아이누 여자의 야성성-각 인물들의 민족성-윤동주의 세계성이라는 구도를 잡고, 새로운 윤동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구도의 각 항목들은 적당했으나, 그 구도의 각 항목들을 잇는 연결선은..
나는 2006년 9월 1일부터 2007년 8월 31일까지 프랑스에 체류하였다. 7년마다 돌아오게끔 되어 있는 ‘연구년’ 명목이었다. 1984년 12월부터 2000년 여름까지 근무했던 충남대학교에서는 그런 제도가 뒤늦게 생겼기 때문에 그 혜택을 누릴 기회가 없었는데, 그제서야 그 과실을 맛 볼 기회를 만난 참이었다. 프랑스에 가기 직전 나는 한국문학과 매우 소원한 상태였다. 2000년경부터 8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문학과사회』 편집에서 물러나고 나만 외톨이로 남은 이후, 나는 대부분의 실무를 후배들에게 넘기고 해외 이론의 소개와 문학 좌담을 이끄는 것으로 내 역할을 한정하였다. 그리고 2004년 겨울호를 끝으로, 『문학과사회』편집도 그만 두었다. 그때쯤이면 나는 평론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있던 ..
지난 월요일(2009.01.12) 이성복 시인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내가 쓴 시, 내가 쓸 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창작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시적 창조는 "중간이나 종합이 아니라 위", "변증법이 아니라 '차원의 이동'"임을 강조하였다. "중간이나 종합이 아니라 위"라는 말은 2차원 평면에서 보면 중간과 종합, 중용과 변증법만이 보이지만, 3차원에서 보면 극단과 중용과 종합이 모두 위의 다른 차원에서 보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그는 그러한 새로운 차원이 가시적인 차원 아래에 말려 있다고도 하였다. 헬리콥터에서 보면 지상의 호스는 하나의 선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호스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면이라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비유를 ..
김종철의 『못의 귀향』(시학, 2009)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옛날의 신산한 삶을 애틋이 회상하는 일을 한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위로와 용서, 거둠과 정돈의 역할을 하는 것, 다시 말해 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을 넉넉히 받아들이게 하는, 통풍 잘 되는 바구니 같은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의 이야기가 은밀하게 두 이야기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삶 이야기’와 ‘말 이야기.’ 그것은 그의 ‘삶 이야기’가 충분히 다스려지지 않는 데서 나온다. 즐겁게, 흔감히 추억하지만 뭔가가 못에 걸린 듯 떨어져 그 스스로 못이 되어 몸의 어느 구석을 슬그머니 찌른다. “못의 귀향”은 ‘못의 귀환’이다. 가령, 식구들이 “밤새 잘 발라 먹은 닭뼈”라든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