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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 속에서 부화하는 신생 – 이성복의 「서시」와 「남해금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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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 속에서 부화하는 신생 – 이성복의 「서시」와 「남해금산」

비평쟁이 괴리 2024. 2. 7. 10:05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서적 압축을 통해 삶에 대한 이해와 느낌을 순수한 언어의 결정(結晶)으로 빚어낸 것을 시라고 배워 왔다. 시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성복의 시가 1980년대 초엽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러한 기대가 철저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 경악한다. 거기에 “잘 빚어진 항아리”(Cleanth Brooks)는 없었고, 찢기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조각났지만 선명했고 알쏭달쏭하지만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복 시의 이 형태적 반란의 배경에는 1980년을 전후해 한국사회의 내부에서 들끓는 모순들의 첨예한 충돌이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사회는 제 3공화국의 경제근대화 정책이 효과를 얻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며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 접근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한반도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 왔으며 독립국이 된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됨으로써 한국인들은 천형과도 같은 피압박자의 삶을 견뎌 왔다. 그러나 독재권력이 주도한 경제 성장은 한국인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독재에 저항하는 힘을 키워가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79년 대통령의 죽음으로 민주주의의 불꽃이 잠시 지펴지는 듯 했는데, 재발된 군사쿠데타와 계엄군에 의한 시민 학살이라는 정치적 재앙을 통해 무참하게 진화되었다.
이성복의 시는 시민 의식의 성장과 정치적 압제에 의한 민주주의의 좌절과 변질이라는 바탕 위에 놓인 한국인의 삶을 ‘치욕’의 구도 하에 압축하였다. 그 치욕은 한국인의 노예적 상황을 그대로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러한 사태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자신의 책임을 지목하고 있었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와 같은 비명이 가리키는 정황이 그것이다. 그리고 “격렬한 고통도 없이” 일상은 모른 척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소리없이 아팠다.”
그러나 이성복의 시는 치욕의 분뇨더미에서 분노의 알이 부화(孵化)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미친 듯이 떨리는 미루나무 잎새들”이 거기 분명히 파닥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떨림이 있는 한,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아 꺼졌으면 하고 중얼거[려도] 꺼지지 않았다.” 이성복의 시가 통일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고 조각난 이미지들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재앙의 한복판에서 희망이 솟아나야 한다면, 그 희망은 어떤 순결한 새가 그 쓰레기장으로 날아옴으로써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억압자들의 비행선이 이미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희망은 재앙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앙이 스스로의 움직임으로 제 본래의 사태를 부정하고 희망의 몸짓으로 재탄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재앙의 이미지도, 희망의 그것도 아니라, 재앙이 스스로 희망으로 변신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현상이 아니라 분열과 변형과 교섭과 융해의 운동이 시시각각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의 전개가 현시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풍경들의 천변만화는 어떤 계기에 의해 시작되는가? 「序詩」는 그에 대한 명료한 대답을 보여준다. 두 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첫 연에서 삶의 요소들이 무의미하게 미끄러져 버리고 ‘나’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연에서 이 무의미한 풍경은 불현 듯 살아 춤추는 광경으로 변신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가 가능했는가?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난다고 시는 적시하고 있다. 그 순간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그리고 이때 나와 당신은 단 둘이 아니다. 모든 존재들이 동시에 사방에서 서로를 부르는 동작으로 번쩍거린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인 것이다.
이 시는 재앙이 희망의 몸짓으로 변신하는 기본 형식을 제시한다. 존재가 존재를 부르고 이미지들이 서로의 형상을 바꾸고 감각들이 착란적으로 마구 뒤섞이는 것, 그것이 기본 형식이다. 또한 이런 광경의 계기도 알려준다. 그것은 상대방을 알아보고 부르는 순간이다. 모두가 서로를 알아볼 때, 다시 말해 비참의 늪에 빠진 존재들이 서로에게서 삶의 가치와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낼 때 신생은 마침내 개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생동하는 삶의 무도가 문자 그대로 휘황찬란한 축제로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생의 발심은 억압적 상황과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되는 시편들이 수록된 시집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1986)은 바로 그 생동하는 삶의 몸짓을 기나긴 인고(忍苦)의 행적과 겹쳐 놓는다. 그렇게 해서, 신생과 인내가, 생동과 끈기가, 무도와 포복(匍匐)이 하나로 뒤엉켜 나아간 끝자락에 시 「남해금산」이 놓인다. 거기에서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통하면서도 승천한 이와 바닷물 속에 잠기는 이가 각기 나뉜다. 독자들이여, 이 기묘한 사연을 오래 되새기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