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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雨水 雨水라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히 창을 여는데 길 건너편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달려들 듯 노을이 흘러가고 가는 바람이 흘러 가고 볼이 붉은 아이가 간다 누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어두운 창이 밝아지면서 추녀가 높이 솟아오르고 불분명한 시간들이 산허리를 타고 강둑 버드나무숲 쪽으로 휘어져간다 (최하림,『풍경 뒤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2001) 밖에 따사로운 봄비가 내리는 줄 알았나 보다. 계절의 이름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심히 창을 여니, 비가 아니라 노을이 흘러가고 바람이 부는 소리였다. 그런데 노을과 바람은 봄비처럼 촉촉이 대지에 스며들지 않는다. 노을은 “달려들 듯 흘러가”며 지붕 아래의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러나 “대동강물이 풀리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고 사람들이 ..
밤과 별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더 어두워진 나무는 가지와 잎을 지워진 세계 위에 놓고 산을 하늘을 더 위로 민다 우듬지 하나는 하늘까지 가서 찌그러지고 있는 달을 꿰고 올라가 몸을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달은 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 산으로 둔다 그 산에서 아직 우는 새는 없다 산 위에까지 구멍을 뚫고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 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문학과지성사, 1999) 오규원이 99년에 상재한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시인이 수년 전부터 주창해 온 ‘날이미지’의 전모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날이미지의 기본 발상은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사물의 움직임을 ..
나의 誤植 바람이 기어 온다 성큼성큼, 바람 틈에 태어난 나는 하늘땅이 비틀거리는 오식이다 햇살 한줄기 뿌리 깊이 박힌 誤字, 오자는 눈이 부시게 시리다 황홀하다 오식 사이사이 심심찮게 드나드는 바람은 사투리다 나는 오늘 지우개가 닳고 없다 (조영서 시집, 『새, 하늘에 날개를 달아주다』, 문학수첩, 2001) 조영서 선생이 27년 만에 시집을 상재하였다. 시들과 함께 뒹군 시인의 땀내가 진하다. 그 땀내를 맡아 보니, 시인은 느릿느릿 그러나 시 한편마다에 온 몸을 던지며 살아 왔다. 그것을 두고 “성큼성큼” “기어”왔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가 성큼성큼 기어 온 세월은 시쓰기를 충동하는 바람을 계속 맞으며 살아 온 세월이다. 그런데 그는 오직 오식만을 심으며 살아 왔다. 하나의 완전한 시, 정식으로서의 ..
거울 ․ 3 무명의 시간들이 익사해 간 거울 속에는 분홍으로 가려 있는 추억의 창도 있지만 빗질을 하면 할수록 헝클리는 오늘이 있다 그러나, 아침마다 잠이 든 넋을 위해 누군가 힘껏 쳐 줄 종소릴 기다리며 우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야 한다. 비가 오고 서리가 오고 국화꽃이 길을 열고 우리 맞는 계절은 늘 이렇게 조화로운데 거울은 무슨 음모에 또 가슴을 죄는구나 (이우걸 시집, 『사전을 뒤적이며』, 동학사, 1996) 보통 독자들은 무심코 지나가겠지만 이 작품은 시조다. 시조하면 무위 자연과 음풍 농월을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실천 탓이다. 그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시조란 곧 생활 속에서 피어오르는 시절가요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조인들이 노력하고 있다. 이우걸도 그 중 한 ..
한 번 만의 꽃 대나무는 평생 좀체로 꽃을 피우는 법 없지만 만에 하나 동지 섣달 꽃 본 듯, 꽃을 한 번 피우기라도 할 양이면 온 대밭의 대나무마다 일제히 희대(稀代)의 소문처럼 꽃들 피어나지만, 그 줄기와 잎은 차츰 마르고 시들어 결국 죽고 만다고 한다. 꿈같은 개화의 한 순간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대나무, 오오 눈부신 자멸(自滅)의 꽃 (이수익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시와시학사, 2000) 새해에는 어떻든 소망의 시를 읽고 싶다. 그러나 소망은 얼마나 자주 배반당하는가. 삶은 늘 기대 저편에서 처연히 자빠져 있거나 보기 흉하게 아득바득거리고 있다. 헛산 인생의 잡동사니들로 가득찬 넝마 자루의 꼴이거나, 증오와 분노로 투닥투닥대는 티검불 더버기의 형상이거나. 하지만 생각..
줄탁 저녁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 2』(1986~1992), 도서출판 솔, 1993) 해가 저물고 있다. 유한자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세모(歲暮)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순환하는 자연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죽음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진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사람과 자연의 두 눈을 포개어 죽음의 비애와 신생의 희열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감정을 증폭시켜왔다. 비애가 클수록 희열은 더욱 차오른다. 김지하의 「줄탁」도 그러한 재생 신화의 한 자락을 펼쳐 보인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