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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오규원의 「밤과 별」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48

밤과 별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더 어두워진 나무는 가지와 잎을 지워진

세계 위에 놓고

산을 하늘을 더 위로 민다

우듬지 하나는 하늘까지 가서

찌그러지고 있는 달을 꿰고 올라가

몸을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달은

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

산으로 둔다 그 산에서

아직 우는 새는 없다

산 위에까지 구멍을 뚫고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

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문학과지성사, 1999)

 

오규원이 99년에 상재한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시인이 수년 전부터 주창해 온 날이미지의 전모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날이미지의 기본 발상은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사물의 움직임을 보여주겠다는 것인데, 실제로 드러나는 시적 효과는 단순하지가 않다. 관념의 해방은 그냥 상투적인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동시에 습관적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이미지의 사물성 자체의 해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령,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같은 구절은 시선을 풀어 놓을 때 어떤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지는가를 실감케 하며, “허공은 사방이 넓다/위에 둥근 해가 반쪽/밑에 둥근 해가 반쪽같은 구절은 나뭇가지 하나로 말미암아 태양이 천상과 지상 두 곳에 동시에 위치하는 마술을 보게 한다. 날이미지의 시적 효과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새롭고 자유로운 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밤과 별은 저 자유로운 생체험이 깊은 현실 인식과 절묘하게 만나고 있는 시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드러낼 수 있다혹은 그래도 달은/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산으로 둔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같은 시구를 가만히 음미해보시라. (쓴날: 2002.02.06, 발표: 주간조선1692, 200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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