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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최하림의 「우수」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49

雨水


雨水
라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히 창을 여는데 길 건너편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달려들 듯 노을이 흘러가고 가는 바람이 흘러

가고 볼이 붉은 아이가 간다 누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어두운 창이 밝아지면서 추녀가 높이 솟아오르고

불분명한 시간들이 산허리를 타고

강둑 버드나무숲 쪽으로 휘어져간다

(최하림,풍경 뒤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2001)

 

밖에 따사로운 봄비가 내리는 줄 알았나 보다. 계절의 이름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심히 창을 여니, 비가 아니라 노을이 흘러가고 바람이 부는 소리였다. 그런데 노을과 바람은 봄비처럼 촉촉이 대지에 스며들지 않는다. 노을은 달려들 듯 흘러가며 지붕 아래의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러나 대동강물이 풀리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우수(雨水)의 바람은 시에서는 가는 바람이다. 봄기운은 내게 달려들 듯 하지만 실은 내 앞에 저만치 거리를 두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건너편 집이 불을 밝혀서 봄이 지나가는 광경이 훌쩍 확대되고 또 그만큼 세상의 모습이 밝아지는데, 꼭 그만큼 시인은 아직도 겨울인 것이다. “춘래불사춘인 심정으로 그의 마음은 저기 휘어져 달아나는 봄바람을 멀찍이 지켜보고만 있다. 시인의 마음이 투사되면 저 환히 열리는 봄 세상은 분명 불분명한 시간들이다. 그 복잡한 마음이 볼이 붉은 아이를 만들어낸다. 그 아이는 신생의 계절을 은유하기도 하고, 불분명한 세상을 쫒아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올해의 봄도 기대와 환멸이 불분명하게 뒤얽힌 채로 막 다가오고 있다. (쓴날:2002.02.19, 발표:주간조선1694, 200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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