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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침묵 속에 더 깊어진 슬픔 — 백무산의 신작 시편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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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침묵 속에 더 깊어진 슬픔 — 백무산의 신작 시편들

비평쟁이 괴리 2024. 3. 14. 08:11

백무산이 오랫만에 시를 발표하였다(『창작과비평』, 1996 가을).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본 게 93년 가을(『실천문학』)이었다. 거기서 나는 빙하처럼 가득하고 날카로운 슬픔과 마주쳤었다. 고단하고 병치레를 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했다. 그 여인이 어려움에 처한 시인을 돌봐주었었다. 헌데 “안부전화를 했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한 마디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꼭 해야 할 것만 같았다”(「「슬픔보다 깊은 곳에」」). 그 말은 들어줄 청자를 찾지 못한 채로 울음 가득히 허공을 떠돌았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돌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초혼가처럼 퍼지고 퍼져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시인의 가슴이 무너질 때 독자의 가슴도 에이었다. 그의 슬픔이 피를 흘릴 때 독자는 슬픔이란 얼마나 가없고 속깊은 것인지를 깨달았다. 슬픔이 슬픔다울 때 그것은 세상 전체를 장악한다. 그럴 땐 어느 곳에도 기쁨의 바늘 구멍은 없다. 있다면 슬픔의 악화, 슬픔의 팽창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발표한 시들에서는 그 슬픔이 어디까지 악화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통분으로 확대된다.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틔운다/그것이 원통하다”(「꽃」). 세상은 나를 슬깃 비껴갈 뿐 나와 만나주지 않는다. 그러나 통분은 원한이 아니다. 시인의 괴로움은 곧바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대한 절망으로 옮겨가고, 급기야는 세상이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해치는 것이다,라는 도저한 자기 모멸의 감정으로까지 치닫는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3년전의 그 여인도 시인을 돌봐주다가 죽고 말았지 않은가?
시인은 “위험한 물건”인 것이다. 행복이 가득한 이 시대에 고통이나, 슬픔이나 퍼뜨리는 자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시인은 “돌이나 치워주고/햇살이나 틔어주마/사랑하는 이여”라고 말한다. 조금은 난데없는 결구다. 돌이 그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터에, 햇살이 그의 편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것을 치우고 틔어줄 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더 독해져야 한다. 그의 절망과 그의 유독성을 거듭 환기시켜야만 한다. 고통과 슬픔을 위로할 노래를 시인은 잃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실상 나는 그렇게 뻔뻔스럽지 못하다. 시인도 그렇게 할 만큼 독한 사람이 아니다. 시인이 슬픈 것은 그가 여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결구는 불가피했으리라. 다만, 그것이 결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패를 예감하는 시작일 것이다. 무수히 많은 다른 시작들을 낳을 원(原)시도일 것이다.(199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