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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응시의 미덕- 백무산의 『그 모든 가장자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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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응시의 미덕- 백무산의 『그 모든 가장자리』

비평쟁이 괴리 2024. 3. 15. 08:15

백무산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는 노동시의 존재이유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노동자 시인이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어휘들은 여전히 그 호칭을 추억하고 있다. “변두리 불구를 추슬러온 퇴출된 노동들”(「예배를 드리러」) 같은 시구가 그것을 또렷이 보여주지만, 그보다는 그가 ‘노동’을 “더 작게 쪼갤 수 없는 목숨의 원소들”이라고 지칭하는 데서 그의 추억의 끈덕짐이 더 진하게 드러난다.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는 존재”가 ‘프롤레타리아’라는 마르크스의 정의가 매우 강렬한 실존적 의상을 입은 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동자적 정념 혹은 사유의 지속을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추억의 범주 안에 넣을 수밖에 없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은 “퇴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필수의 질료가 삶 저편에 위치해 있는 상태, 그 앞에서 시인의 마음도 무너지고 정신도 망실된다.
이러한 정서적 공황은 1990년대 이후 대부분의 변혁적 지식인들이 겪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소비문화의 빅뱅 앞에서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전복의 열기를 가득 싣고 질주했던 트럭들이 일제히 파열된 타이어 위로 튀어오르며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벼랑 밑으로 나뒹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추락을 노래한 시와 소설은 지금까지 수없이 씌어졌다. 그렇다면 백무산의 이 시집이 가지는 변별성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그의 지금의 정신적 지향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에 비추어 던져져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노동자의 대의를 여전히 보듬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그의 시가 어떤 길을 뒤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가 다른 전망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이동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 경로는 어떻게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가 노동자의 생리를 간직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노동자의 대의를 놓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다른 전망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다. 한편으로 그는 대의의 존속 여부를 물을 시간도 갖지 못한 채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실종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그는 “인간진화의 자기상실”(「진화론」)이 인간에 의해 저질러졌고 그것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목격한 또 다른 광경은, 그의 전망이 적에 의해서 이미 선점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사태이다. 「이웃집에 도서관이 생겼다」같은 시에 그 모습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향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그의 마음이 무엇보다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인간진화의 자기상실”이라는 문명적 사태에 대해 그가 의견을 수정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그는 대의의 장소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아니 최소한 삶의 참됨을 보장해줄 수 있는 준거점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서”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한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급성이라고 말하려다 /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 계급적 감수성이라고 말하려다 / 생명의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 제길, 감수성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염치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는 마음이 복잡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그는 생명의 감수성, 혹은 염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 세상의 전망(의 실종)보다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는 노동자의 전망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못한다. 정직하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급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생명의 감수성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제길,”이라는 비명 같은 간투사가 전달하는 게 바로 그 곤혹스런 감정이다.
이 때문에 그의 시에는 과거와 미래가 착종되어 있다. “내 몸에 새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까 / 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잃어버린 새」) 같은 시구는 이 착종이 멀어짐과 당겨짐의 장력을 생성하는 흥미로운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 장력은 새의 형상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미래를 향한 움직임과 그 새를 “잃어버린 새”라고 지칭하는 내 마음의 과거 지향이 겹쳐진 데서 오는 것이리라. 그 “잃어버린 새”라는 지칭에는 그의 과거의 이념이 ‘그때에는’ 미래의 새였던 것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새를 충동적으로 새로 찾을 새의 방향으로 밀어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정직성은 그 환각을 물음표 안에 가두고야 만다. 그 정직성 덕분에 새는 날개를 파닥거린다. 그렇지 않으면 “산새처럼 날라갔”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 시집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자기 응시’의 철저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희망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도 못한다. 거기에는 그 스스로 살아 온 오십여년의 전 생애가 걸려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할 수는 없다. 저 옛날처럼 무조건 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미지의 과제가 된다. 그것은 비참한 패배의 외관을 벗고, 궁금증으로 남는다. 그것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새는 천천히 두려움을 거두고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살아 있는 한 잃어버린 양을 몽땅 가능성으로 바꾸길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가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다. “삶은 이미 벼랑 끝에 있었던” 것이고, 그 삶을 정직히 감당하려고 작정하면, “그대라는 실낱에 전부가 매달려 있”(「슬픈 인사」)다. 이 자기 응시가 그대로 박힌 못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문명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있으니, 그 응시를 넘어 가보아야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