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시고 떫은 시-- 윤중호의 『본동에 내리는 비』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둘

시고 떫은 시-- 윤중호의 『본동에 내리는 비』

비평쟁이 괴리 2024. 3. 17. 10:42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지성사, 1988) 뒷 표지에 의하면, 윤중호는 서울 사는 촌놈이다. 서울에선 "에그 촌놈" 소리를 들으며, 고향에 가면, 친구들이 말은 안하지만, 그의 몸 구석 어딘가에 빤지름한 도시의 물때가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하다. 그는 이 `재수 없는 삶'이나, 그의 시들이나 꼭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도시 때가 묻어 있다고 어색해 하는 그만큼 그는 촌놈이며, `촌놈'소리를 들으며 버티는 그만큼 서울과 싸우는 서울놈이다. 그 싸움은 서울로 상징되는 지배적 생활 양식이 낳은 갖가지 부정적인 삶의 모습들, 물질 만능, 속도 경쟁, 투기, 조직적 폭력, 자기 보존 본능, 타인에 대한 무관심 등과 그로 인해 촌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가난과 소외와 죽음, 그리고 설움과 부끄러움을 이겨내려는 싸움이다.
윤중호 시의 힘은, 그러나, 그 싸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을 하는 방식에 있다. 얄팍한 시들의 현실 비판이, 역설적이게도 제도 언어의 틀 속에 갇힌 채 배설되고 있다면, 그는 비판 대신에 `살아냄'의 의지와 과정을, 생활로부터 우러나오는 언어를 통해 생생하게 구성해낸다.
그 언어는 크게 두가지 방법의 뒤섞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비유이며, 둘은 목소리이다. 비유는 가령, "고향의 살구꽃 대신, 줄줄이/ 때낀 가난을 걸어놓아도"에서처럼 가난을 널린 빨래에 비유하거나, "비가 왔다, 부는 바람으로/올라오던 강냉이가 일제히 엎드려 있고"에서의 촌사람들의 빈약한 삶을 대리하는 `강냉이'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목소리는 가령, "내가 벽을 쿵쿵 두드리자 그 아저씨 한물간 목소리로 `총각 왜 시끄러워서 그랴' `아뉴 볼륨좀 높여 달라구유' 어쩌구 악을 쓰며 신이 났는데" 같은 구절의 대화 부분, 혹은 "사흘 동안이나 꽁꽁 얼며 구한 방은/ 보증금이 모자라, 하루만 참아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어/ 그 집 대문 앞에 짐을 쌓아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웬 청승이랴?/ 이 차가운 겨울비는……"의 `웬 청승이랴'같은 구절처럼 시 속 인물들의 여실한 육체의 모습을 전달한다.
그의 비유나 목소리는 모두, 생활의 구체성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언어의 움직임들인데, 비유는 그 언어의 감춤이며, 목소리는 그것의 드러냄이다. 비유일 때, 그 언어는 제도 언어의 뒷면에 끼여 그것과 비벼지면서 현실에 억눌리는 사람들의 아린 마음을 분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목소리일 때, 그 언어는 제도 언어와 거칠게 부닥쳐, 그것의 번지르르한 겉면을 치고 부순다. 전자의 방향으로 나갈 때 그의 시는 시어지고, 후자의 방향으로 나갈 때 그의 시는 떫어진다.
그 시고 떫은 시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이 그저 힘없고 억눌린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살아냄은 제도 언어가 포장하고 있는 서울의 지배적 생활 양식과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생활로부터 우러나오는 독특한 생활 양식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충돌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케 한다. (쓴날: 1988.11.25, 발표: 『동아일보』1988.11.28)

 [부기] 윤중호는 2004년 9월 23일 췌장암으로 타계하였다. 나와 윤중호는 충남중학교 동기동창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나는 그와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어쩌다 볼 때마다 그는 엊그제 만났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아쉽게 헤어졌던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그의 음성과 표정과 미소가 눈에 선하다. (2009.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