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세상의 사막을 알아버린 자의 더운 유랑―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둘

세상의 사막을 알아버린 자의 더운 유랑―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비평쟁이 괴리 2024. 3. 7. 02:03

남진우씨의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2006)는 “내 낡은 모자 속에서 /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모자이야기」)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시인은 말한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우리가 씨의 ‘낡은 모자’를 시의 비유로 읽는다면, 이 시구들은 하나의 시론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언에 의하면 시인은 변신의 시가 아니라 유랑의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변신의 시란 은유로 가득 찬 시를 뜻한다. 그리고 은유로 가득찬 시란 대상과의 합일이 때마다 충만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유랑의 시에도 은유에 대한 꿈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변신의 시에서와는 달리 거기에는 즉각적인 동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동화가 일어난다 해도, 거기에는 합일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이 없다. 왜냐하면 그 동화에는 뿌듯한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지속의 예감은 더욱 더 없고, 단지 오감을 잠시 스치다가 사라질 어떤 여운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이 가리키는 게 바로 그러한 상태이다. 그 상태를 합일에의 욕망을 여전히 지속시키면서 유지하고 있을 때, 그 욕망은 결코 실현되지 못하지만 또한 동시에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들끓는 충동으로 격발하려고 한다. 그러나 유랑의 시는 그러한 충동을 낡은 모자 속에 담은 채로 저의 꿈을 찾아 편력하는 시이다. 
물론 그 편력은 “끝없는 사막”을 떠다니는 편력이다. 당연히 이 사막은 은유의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그렇게 남진우 시의 비유는 어떤 대상을 ‘포착’하지 못한 채 비유하고자 했던 생생한 몸짓만을 남기고 직설로 회귀한다. 만일 그가 새벽 세 시에 사자 한 마리를 보았다면 그 역시, 실제의 사자도 아니지만, 또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사자이다. 그 사자는 출몰하려고 하다가 그대로 출몰의 기척으로서 정지한 도래하지 못한 사자이다. 그 사자의 기척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는 시시각각으로 울려, “잠자리에 누운 내 심장에 와 부딪치고 / 창 가득히 밀려온 밤하늘엔 별 하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을 두고 오직 ‘신비’를 찾아 헤맨 낭만주의자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은유의 실패로서의 그의 사막은 비천하고 저열한 일상 그 자체이다. “모든 예언은 거짓이거나 농담”임을 깨달은 사람이 헤맬 곳은 거기 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일종의 윤리적 태도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일상을 환상으로 분칠하는 환상주의자들의 농담을 뚫고 일상 속으로 내려와 또한 그것을 곧바로 역사 전망에 투영하는 역사주의자들의 거짓을 헤치며 헤매인다. 그 헤맴 속에서 시인은 비천하고 데데한 일상을 속화하지도 성화하지도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 일상의 풍경 자체가 신비를 향한 움직임으로 내내 꿈틀거리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목격자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들끓는 일상 속을 천천히 주유한다. ‘천천히’라는 말을 ‘반성적으로’라고 바꾸어도 무방하리라. 그는 천천히 주유하는 가운데 한편으로 나날의 ‘망령들’이 제 안에 가득 채워지는 것을 기록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 망령들의 통곡과 발버둥에 비추어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되돌아보지만, 시인은 또한 “어느 시인도 독으로 일생을 살진 못했다”는 것을 새삼 되새긴다. 중요한 것은 “서서히 독에 마비되어가는 몸을 젖히고 / […] 책 속을 빠져나가는 독사 한마리”를 “길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 좌절하는 형상으로 솟구치는 일상을 제 몸에 육화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시인은 죄를 걸친 몸으로 세상을 평생 떠도는 것이니, 그것만이 생의 비밀을 밝혀 줄 생의 비밀인 것이다. (2007,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심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