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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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21년 이상문학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1. 3. 3. 20:11

※ 아래 글은 2021년 이상문학상 심사평이다. 「문학사상」 2월호에 실렸다. 잡지의 다음호가 나와서, 블로그에 싣는다. 덧붙이자면, 나는 작품 분석 속에 한국소설에 대한 당부를 심으려고 나름으로 고심하였다. 소설 공부를 하는 분들에게는 참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소설의 심줄 혹은 문장의 가치

▶ 개관

시방 한국 소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국 소설은 점점 독자들의 취향이 유효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경향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그것은 고급 독자들이라 할 수 있는 비평가들의 비평적 활동 및 파장 범위가 현격히 약화된 반면, 일반 독자들의 다양한 감상들이 유사성의 증대를 통해 몇 종류의 트렌드를 이루면서 독서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출판사를 매개로 한 작가들이 그 영향에 부응하면서, 독자들의 움직임이 아예 플랫폼화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심각한 것은 작가와 독자들 사이의 역동적인 경쟁이 사라지고 한쪽으로의 일방적 흡수가 진행되는 현상이다. 이 흡수는 감염적이어서 독자들의 취향들조차도 특정한 추세의 지배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예전에 작가 쪽에서 일어나던 현상이 이제 독자 쪽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의 강화는 궁극적으로 문학의 생명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학의 저하를 보여주는 현상은 단순히 취향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다. 후보작들을 검토하면서 디테일의 부정확성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유별나게 눈에 띈다. 현실의 맥락과 무관하게 주관적 공상 속에서 창조된 세계가 현실의 이름을 달고 제출되고, 그 안에 그 역시 주관적인 세계인식들이 사회적 풍경으로 묘사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면 근심이 쌓일 수밖에 없다. 혹시나 내가 작가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게 아닌가 싶어서 여러 번 생각하지만, 그쪽으론 괘가 나오질 않는다. 그나마 중견 작가들, 이승우, 윤성희, 천운영의 소설들에서 문장이 크게 안정되어 있는 걸 보면서 안도를 한다. 문장의 안정성이란 글을 단순하게 쓰는 것과는 다르다. 헤밍웨이처럼 단순하게 쓸 수도 있고, 조이스처럼 복잡하게 쓸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든 그들의 문장은 의미 혹은 느낌과 맺는 긴장의 선이 탄탄한 심줄을 이루고 있다. 그 심줄의 질김의 정도가 불필요한 해독의 혼란을 떨쳐버리고 세상의 쇄신을 지향하는 진짜 혼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척도이다. 그걸 다른 말로 바꾼 게 바로 문장의 안정성이다.

장은진의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

장은진의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은 연약한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존재, 부적응자들에 대한 애가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라는 이름의 무리 안에 안착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약한자들의 공동체를 떠나려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난다.

이런 구도는 낯설지가 않다. 어쩌면 상투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중요한 통찰을 하나 건지고 있다. 그것은 외로운 자들은 끝끝내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로운 자들의 공동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자들은 그들의 연대를 꿈꾼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생존의 고리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자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의 사연이랴! 그렇게 절실하게 추구되는 외로운 자들의 공동체는, 그러나,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득히 멀어져가는 신기루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것에서 눈길을 결코 떼지 못하는 인물의 모습은 독자를 처연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것이 이 작품의 애틋함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이 작품을 아주 작은 소품으로 만든다.

 박형서의 97의 세계

박형서의 97의 세계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생존게임을 벌이는 일을 타임 루프를 탈출하는 게임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 작가는 삶의 현장에서 필사적인 생존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생존은 필사적인 게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그것을 게임을 통해서 모의 실험을 하는 일에 초대하고 있다. 삶은 그것이 생존게임일 때도 그냥 겪고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은 그것이 삶을 무대로 하고 있을 때에도 게임이기 때문에 치열한 머리 싸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이 게임화된 삶은 무척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 어려움이 사는 건 어렵다는 뻔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상을 노린다면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하나는 이 롤 플레잉이 국면마다 지적 호기심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유사한 유형의 영화,에지 오브 투머로우( Doug Liman 감독, 2014)만큼, 때마다 흥미를 자아내는 아이디어와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는가? 다음, 여하튼 소설은 게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각박한 삶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끝난 뒤, 그것은 어떻게 삶에게 쬐어질 것인가? "우리 뭐라도 좀 해봅시다"라는 막연한 말의 되풀이는 이 작품이 타임 루프 게임을 다룬 소설이라기보다 게임이라는 타임 루프에 걸린 것이 아닌가?, 를 궁금해하게 한다. 무척 공들여 쓴 소설이지만 또한 무척 아쉬워서 미련을 남기는 소설이다.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 주오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 주오는 기계적 구도로 보면 네 세대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 아버지라는 매개항이 끼어들어 그 개입 방식에 따라 네 세대 여인들의 비중에 가감이 주어지고 동시에 여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핵심이 되는 인물은 세 번째 세대인 명자이고, ‘명자’-아버지와 명자’-남편의 관계의 차이를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된다. 꽤 극적인 사연들을 담고 있는 게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장점이라면, 이 관계들의 양상은 독자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명자’-아버지, ‘명자’-남편의 관계가 특별한 성질을 가지는 반면, (명자) 아버지-아내, 아버지-어머니(화자인 딸의 증조할머니), -남편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혹은 도구적으로’(특히, 증조할머니의 경우)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 작품에 불균등한 굴곡을 형성하는데, 이 불균등성이 강점인지 약점인지 알려면 다음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 ‘명자’-아버지의 괸계가 각별히 소중하게 조명되는 반면, ‘명자’-남편의 관계는 그 주제적 무게에 비해,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있다(남편의 폭력적 성격이 암시될 뿐이다)는 점이다. 바로 이 관계 기술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명자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남편의 아버지 역할을 하게끔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인과율은 핵심 인물 명자의 삶에 각별한 의미의 무게를 싣는다. 그러나 그 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인물들의 삶을 반비례의 방식으로 무가치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꾸로 명자의 삶 자체의 성격을 아리송하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흥미진진하면서도 그 의미의 반향력에 의혹을 품게 하는 소설이다.

윤성희의 블랙홀

윤성희는 수다의 대가이다. 수다의 문학적 효과는 무엇인가? 수다는 기본적으로 근친(近親)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오고가는 언어의 급류이다. 통상 우리가 언어를 의미 전달의 도구라 할 때, 그 의미 전달은 두 낯선 타자를 전제로 한다. 언어가 없으면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언어를 고립시켜서 그 존재이유를 생각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수다는 낯선 이들을 만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익숙한 이들이 푸는 것이다. 언어의 목표는 만남이지만 수다의 목표는 그게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양태는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윤성희보다 더 강한 수다꾼은 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이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뿐만 아니라, 생각, 눈길 등 모든 감각적 행위들이 수다의 형식을 띠고 있다. 프랜즌의 수다는 미국 사회가 자질구레한 욕망들의 집적체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그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적 원리인 민주주의와 종이 한 장 아래에서 법석거리는 민주화된 욕심들, 다시 말해 민주사회를 사유화하려는 욕망 사이의 상호 조응과 어긋남, 그리고 조절의 문제에 대한 칡넝쿨 같은 질문들을 더듬어 간다.

윤성희의 수다는 그와 유사하면서 동시에 다른 특성을 가진 듯하다. 우선 프랜즌에게 수다스러운 존재가 인물들이라면, 윤성희에게는 화자가 수다쟁이라는 게 기본적인 차이이다. 프랜즌의 화자는 인물들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다 상황에 대한 객관화가 그의 임무이다. 반면 윤성희 작품에서는 화자가 수다쟁이이기 때문에 객관화가 아니라, 차라리 근친화가 그것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 근친화라는 기능의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 내용을 보면 이 근친화는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상호 몰이해, 즉 몸의 교류는 있으나 정신의 소통은 없는 부락적 사회에 이해의 격자를 설치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화자의 개입은 그렇게 해서 가족과 이웃들 사이의 온갖 불화를 지지고 볶는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건을 이야기로 바꾸면서, 불화의 표징인 사건을 화해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구도를 통해 윤성희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몰이해성이 언어의 불충분한 축적에 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을 해결하려는 언어, 즉 수다의 불충분성으로 인한 위기를 정직하게 보고한다. 그 불충분성은 언어의 두께는 언어의 수량적 증대로서 충족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작가의 정직성은 오로지 그가 거기에 매달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외줄기 길처럼 무작정 흘러가면서 즉석에서 소비된다. 그것은 그의 작품 세계가 더 넓어져야 한다는 권유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승우의 마음의 부력

이승우의 마음의 부력은 작게는 형제간의 우열 관계로 인한 심리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크게는 인간사회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진행되는 비교와 선망과 상처주기와 상처받기, 그리고 이 불가피한 불균등성들을 감싸안으며 함께 사는 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색이다.

왜 이런 소설이 필요했는가? 이 소설의 촛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능력과 성취와 근면과 성실만으로 판정되는 일이 항상 정당하지는 않다는 각성을 두르고 피어오른다. 이러한 각성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중요한 변화의 계기 앞에서 인류가 거듭 좌절하고만 사연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근대 사회가 성립된 이후 가장 강력한 행동지침으로 작용한 것은 사회진화론의 강령,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승리하라는 촉구이다. 근대 사회는 이 강령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가속화한 반면, 지구상의 모든 관계를(인간 뿐만 아니라 생명 일반에 대한) 도구적 이성의 지배 하에 놓음으로써 미래사의 심부에 자멸성을 심어놓게 하였다. 그에 대한 반성을 독촉하는 외침들과 대안들이 수도 없이 출현하였지만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유효성의 수치가 충분한 선을 넘어선 예는 없다.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는 헌신과 희생들이 턱걸이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의 형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인류 발전의 최종적 결과로서 절멸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모든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 본래적 성질에 의해서 아/비아의 이분법적 갈등 관계 너머를 탐색하는 최전선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승우의 모든 소설들은 실상 거기에 투신해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의 부력은 그 문제의 바다의 유영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모형선이다. 한편으로 부부의 설정을 통해 항상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과 꺼림직한 무언가를 안고 사는 사람 사이를 대비시키며, 꺼림직한 것의 존재 이유를 시나브로 다져나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식이라는 매개항을 통해서 그 극복의 가능성을 점친다. 옳고 그름을 일도양단할 수 없는 까닭은, 옳아서 우위에 놓인 자는 그 결과로 상대방을 상처입히는 작은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낮은 위치로 전락한 사람은 그 전락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더 나아가 그 둘 사이에 벌어진 파동을 보살펴야 하는 사람은 그 보살피는 손길이 개입할 때마다 꺼림직함을 남긴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죄의식의 다면체를 구축하면서, 그것들을 회전시키면서 독자에게 관계의 복잡성을 차근차근 따져볼 기회를 갖게 한다. 하지만 이 회전 목마는 어지럼증을 유발할 뿐이다. 작가는 이 수평의 소용돌이에 성서의 야곱/에서 일화를 쬠으로써, 해결책은 아니지만 인류의 오랜 숙제로서의 문제임을 환기시키며, 이로써 인류 보편의 과제에 대한 믿음을 부여한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미덕은 독자에게 삶의 복잡성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옹골찬 사색 속으로 끌어당기는 유인력에 있다. 그 덕분에 독자는 평생을 고민하면서 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고민으로 인해 독자의 정신은 거듭 드높아질 것이다. 이 작품을 대상 수상작으로 적극 추천한 소이가 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