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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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8년 제 2차 '의사문학상' 소설 부문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18

응모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지적 능력은 곧 표현 능력이라는 점을 새삼 느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글에 대한 열정과 이야기에 대한 착상 그리고 형상화하는 솜씨 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이는 의사들의 개가(凱歌)이자 동시에 문학의 위력이라고 할 만 했다. 의사들의 지적 능력이 수준급의 표현물들을 생산했다면, 다른 한편 문학의 매력이 그렇게 고급 두뇌들을 끌어당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순수한 열정이 문학적 차원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충족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서술상의 리얼리티라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묘사의 정확성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건 전개의 자연스러움을 또한 가리킨다. 사건이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케 하면서도 단락들 사이에 엉뚱한 비약이나 답답한 반복이 없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야기의 극화라는 문제이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극적인 사건을 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소설의 중요한 명제 중의 하나는 가장 진부한 일상이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극적인 사건을 택해서라기보다는 평범한 삶 속에서 극적인 의미를 캐낼 때 소설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물의 성격이라는 문제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못난 인물일 필요도 없지만 비범한 인물일 이유도 없다. 오히려 현대소설의 주인공은 광인이나 범죄자에 가깝다. 진리가 숨은 시대에 진정한 방법을 몰라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본받을 만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절한 행위를 통해서 인간과 사회의 관계의 의미를 최대한 부각시킨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일반부 응모작에선 양희찬씨의 장편 주피터의 비밀, 대학생 응모작에선 정호길씨의 단편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방법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주피터의 비밀은 학교 폭력(그리고 가정 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와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정신분석적 아이디어를 기본 모티프로 하는 문제 해결의 드라마로부터 출발하지만, 폭력 주체와 문제 해결 주체를 뒤섞음으로써, 그것을 긴박한 복수 및 추리극으로 변환시킨 작품이다. 그 결과, 인간의 건강한 의지와 광기어린 집념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독자는 산다는 것의 난해함 앞에서 오랜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서브리미널 효과의 실제적 효용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것이고 작가의 프로이트 이해가 미국식 자아심리학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것도 프로이디언들의 입방아에 오를 사안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소설 바깥에서 제기될 문제라서, 심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동료들의 화재 참사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젊은 의학도들의 일탈과 방황을 그린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 방법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사소한 행동과 관련된 사건을 어떻게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을 수 있는가 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고뇌와 사소한 우연들의 결과인 듯이 보이는 불행한 재앙을 은밀히 도모한 인간의 음험한 파괴충동을 야릇하게 겹쳐 놓은 작품이다. 이 두 문제가 같은 사건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작품을 불안의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 경중을 재면서 해석의 폭을 스스로 넓혀가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소설적 실험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분열증적 기획이 잘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내적 장치가 꽤 단단해야 한다는 것을 젊은 작가는 잘 새겨야 하리라. (손명세, 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