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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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3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10

나는 지금도 시가 생으로부터 솟아난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시는 삶의 고뇌이고 삶의 박동이며 삶의 변형이라는 것 말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미리 시적 정황을 가정하는 시들로부터 큰 감흥을 얻지 못해 왔다.

시적 정황을 사전에 가정하는 시쓰기는 점점 도드라지고 있는 경향이다. 최근에는 시적 정황을 가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시적 정황을 아예 처음부터 구축한 후에 언어를 그 주형 안에 배치하는 수준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그런 시는 우선 머리 속에 그럴 듯하게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형상 혹은 존재태들 그리고 배경이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불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것은 시의 본래적 동경에 해당하는 것이라서 그것만으로 시적 정황을 미리 가정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가능성의 천칭 위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조립의 판 위에서 제기된다는 것이 두번째 조건이다. 삶의 사건들은, 문득 시의 판 위에 옮겨지는 순간, 그것들을 구속하고 있던 시공간의 무게로부터 해방되어, 상상하는 자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기능과 의미를 부여받아 상상 세계의 구성에 동원된다. 현실의 사건들은 각각 상상 세계를 그리기 위한 소도구들 혹은 기호 그물의 코를 이룬다.

그런데 그게 나는 자꾸 꺼림칙한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나날의 사건들, 혹은 펼쳐지는 권태롭거나 장관인 풍경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겪는 그것들은 저마다 나름의 삶의 권리와 그 권리에 대한 그 자신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시는 상상 세계의 창조라는 권능을 핑계로 그것들을 함부로 넣었다 뺐다, 잘랐다 붙였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제재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이 아닐까?

물론 내 취향은 사사로운 것이며, 시의 성취는 공적인 것이다. 우러나왔든, 공작놀이를 했든 간에, 문제는 시의 궁극적인 효과, 즉 감동이다. 이빨이 썩으면 뽑고 의치를 심는 게 당연해진 현실이다. 인공 이빨이 더 저작 기능이 뛰어나다면 본래의 이빨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은 얹어 놓을 지붕도 없어서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린 옛날의 신체발부를 그리워한다면, 그 심사는, 그게 사실 내 취향인데,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이다.

이빨의 저작 기능에 해당하는 것이 시의 감동일 것이며, 감동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방식으로 썼느냐는 하찮은 문제다. 그러나 이 감동이라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감동하는 시구에서 타인은 전혀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법이고,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다수의 감동을 시적 우월성의 표지로 삼을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통상 고급한 취향과 평범한 취향들의 차이를 전제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흔히 취향의 질은 문학 외적인 것들, 그러니까 인식의 수준, 윤리적 태도, 사유의 굴곡 등의 우회로를 거쳐 풀이되어 왔을 뿐, 보편적 미적 원칙을 통해 해명된 적은 없다(아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적 필연성에 의한 반전이 우연한 사건들에 의한 그것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에 대한 상반되고 이질적인 수많은 주장들은 미학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제기되었고 또 상용되었는가?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의한 반전이란 사유의 굴곡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단 말인가?) 하긴, ‘모든 것은 그 아닌 것으로부터 온다는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 버린 명제를 염두에 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타자들의 형성물로서의 자아, 그 재료들의 취사선택과 선택과 조합의 방식과, 그리고 시간과 공간 등의 우연성의 개입이라는, 그 스스로가 되고 마는 나름의 사정(알고리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안마다 너무 달라서, 일반화시키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인류의 두뇌 진화사와 두뇌의 구조가 완전히 해명되는 날이 오면, 혹시 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글쎄... 그 날이 인류 종말의 날, 사과나무 한 그루가 외로움에 떠는 날이 되지나 않을까?

각설하고, 이번에 후보작으로 추천된 시들에서도 나는 그런 경향이 꽤 강력함을 다시 확인한다. 이향지씨의 대해 속의 고깔모자도 얼마간은 그런 유형에 속한다. ‘얼마간이라는 유보를 단 것은 이 시가 섬은 고깔모자처럼 보인다라는 순간적 직관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 직관 자체는 사물에 대한 섬세한 시선(발견)에서 오는 것이지 인공적인 조작을 통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인은 그 직관의 비밀을 탐구하는 대신 이 가벼운 직관(왜 가볍냐 하면, 이 직관은 삶에 대한 통찰은 아니기 때문이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바깥으로 더욱 뻗어나간다. 모자 달걀 시계로 이어지는 연상의 흐름은 그러한 상상의 자유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이 연상의 흐름 속에서 시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삶의 숙명적인 하찮음, 그 하찮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그 또한 운명적인, 집착, 아니 차라리 안달복달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해야할 마음의 번잡한 움직임(, 그 고깔스러움), 그러나 그 번잡함이 아무 결론에도 이르지 못해 번잡함의 주위에 연기처럼 피워내는 무척 지루하다는 느낌들,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의 움직임들의 숙명성에 대한 불기피한(그 역시 숙명적인) 수락과 그 수락 자체를 다시 삶의 에너지로 삼는 은근한 용기 등등의 마음의 내력, 아니 차라리 마음의 역사를 새겨 넣고 있다. 방법은 인공 조작이었으나 그것의 생산품은 장난감도 기형아도 아니라 자연인이었던 것이다. ‘돌리가 아니라 둘리였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작품을 특이하다고, 혹은 멋있다고, 본 이유이다. 나의 의견이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시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나로서는, 이 결정이 90년대 이래 생장해 온 새로운 시적 경향에 대한 하나의 공적 인정이자 동시에 그 경향이 도달한 어느 한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기보다는 축복의 폭발물들을 보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