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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5년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21

심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현대시에서 매달 선정하는 현대시작품상 이 달의 추천작에서 소개되었던 시인 한 분이 그 사실에 대해 남우세스럽다며 언짢은 표정을 지으셨던 게 기억이 났다. 아마도 등단한 지 30년이 가까워 오는 사람이 '짬밥수가 적은' 시인들 틈에 끼이는 것이 못내 불편했던 것 같다. 평소에 젊은 시인들과 잘 어울리는 분임을 감안하면 현대시의 소개가 ''의 후보작을 공시하는 소개였다는 것이 그의 결벽증을 촉발한 것이리라. 잠시 궁리하다가 나는 나의 짐작이 그의 진의라고 판단하고 그 의사를 존중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으며(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염결한 태도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현대시 작품상'에 그런 '제대규정'은 없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그걸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알려 작품상 심사 대상에서 그 분의 작품을 아예 제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심사 대상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나는 문인수의 꼭지, 위선환의 지평선, 이원의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이정록의 신의 뒤편, 채호기의 아끈다랑쉬(시인 이름 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문인수와 이정록은 오늘의 서정시의 한 특징적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그 특징적 경향은 전통적인 서정시가 했던 것처럼 서정시가 자연에 행복하게 의탁할 수 없게 된 시대에서, 아니 차라리 그런 정직한 인식 속에서, 그럼에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연결하고자 하는 갈망을 어쩌지 못해 돌파구를 찾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경향이다. 그래서 지지한 인생에 대한 잠언적인 통찰이 나오는 것인데, 그 때 잠언은 일상 언어를 찢고 통찰은 일상적 사고를 뚫는다. 그러나 현대시가 그러하는 것처럼 그 찢음과 뚫음의 작업을 반성적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찢긴 곳 너머에 있는 더 큰 세계에 대한 암시로 정황을 감싼다. 이 과정 속에서 때로는 부정적인 방향이 승하고 때로는 긍정적인 방향이 승하다. 꼭지는 부정적인 방향이 운명적인 저주로까지 졸아든 경우이고 신의 뒤편은 긍정적인 방향이 '후광'을 두르게 된 경우이다. 그 어느 쪽이든 잠언적 통찰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를 이룬다. 위선환의 지평선은 본문만 읽어서는 해독이 어렵고, 제목의 프리즘을 통과시켜야 그 정황이 떠오르는데 그 광경이 무척 선연하다. 기본적인 주제는 막다른 골목이 바로 지평선이라는 것인데, 물론 시 자체는 주제 이상이다. 복구와 반증의 차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즉 앞의 두 시는 서정적인 것을 회복하려 한다면, 지평선은 서정적인 것의 실종이라는 사태를 아예 부인한다. 여기가 서정이다, 라고 그의 시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두 시가 틈새를 노리는 데 비해 지평선은 반전을 행하는 것인데, 그 반전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반전이 처음 일어나는 지점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이며, 두 번째 반전은 "죽을만큼 황홀한 장엄이 아닌가"라는 시구에서 '죽을만큼'이라는 어휘 안에 교묘하게 숨어 있다. 채호기의 시는 여전히 독립적이다. 그의 시는 서정시나 현대시라는 일반적인 유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절대 관념의 시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시적 태도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김춘수와 오규원의 초기시에 그런 추구가 있었다. 그런데 선배 시인들이 절대의 벽에서 되 튕겨져 나가면서 대상 치환 또는 대상 변용의 방식을 통해서 궁지를 해결한 데 비해 채호기의 시는 끝까지 그 벽에 '헤딩'을 한다. 물론 그 벽이 '투명한 막'임을 그가 모르지 않기에, 그러니까 그 앎은 사실 무지의 불치병인 셈인데 어쨌든, 그 앎과 몸 사이에서 기괴한 환각들이 출몰한다. 사물과 현상들이 그대로 실재가 되는 사태가, 육체가 그대로 관념이 되는 사태가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 시를 읽으며 나는 시인이 '아끈다랑쉬'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를 물어보았다. 어쨌든 그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거기에 갔으니까. 대답은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묘한 이름만큼이나 시의 풍경들이 기묘하게도 시선을 옭아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원의 몸 밖에서 몸 안으로는 시인 특유의 직관적 사고와 감각적 아이러니가 수일한 표상을 얻은 경우다. 그의 직관적 사고는 예고된 재앙을 직접적 경험으로 이끄는 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 시는 그렇게 해서 체험된 직접적인 재앙을 복합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그 복합성은 "새벽은 어둠의 녹슬어가는 몸이다""죽음은 끝까지 관념이다"라는 두 명제가 팽팽히 긴장하고 있는 데서 온다. 이 명제들 각각이 꽤 복잡한 사유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지만, 이 긴장은 이원의 시가 한층 원숙해졌음을 알리는 표지이다. 수상보다도 그의 성숙에 축전을 띄우는 게 더 바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