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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6년 제 1회 '이형기 문학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17

취향의 무정부상태를 넘어서 이형기적인 것을 향하여

 

예심을 통한 여과의 절차들이 심한 거북함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그 절차의 합당성을 따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오늘날 취향의 무정부상태를 생각키우기 때문이다. 시를 시로 세워주는 것이 시의 경향은 아닐 것이다. 서정시든 미래시든 도시시든, 어떤 명명으로 시들을 가두건, 그 안에서도 좋은 시와 나쁜 시는 따로 갈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의 잘 되고 못 됨을 단순히 시의 짜임새에서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 때의 형식주의자들이 생각했듯이 좋은 시가 잘 빚어진 항아리와 혼동될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시의 성취 속에는 그 성취의 기준을 돌파하는 사업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를 통한 부활의 작업이 없다면 인간이 어디에서 인간됨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본래 인간이 인간 너머로 가기 위해 운명지워진 존재인 한은.

그러나 시적 성취의 기준이 그 어디에도 없다면, 벡터에도 스칼라에도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시를 논할 것이고 시를 따질 것이며 시를 구할 것이고 시를 느낄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부재하는 상태가 앞에서 말한 취향의 무정부상태의 정확한 정의일 것인데, 이 상태가 범상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시에 대한 담론의 현재적 수준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거의 무의식적인 지식의 이름 아래 두 가지 극단적인 판단이 시적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데, 하나는 쉽게 읽히는 시에 대한 맹목적인 경사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조작에 대한 그 역시 거의 맹목적인 흥분이다.

이 두 가지 극단적 판단이 범람하는 원인을, 시의 기준을 벡터에서도 스칼라에서도찾지 못하는 상황으로 지목했다면, 그에 대한 해답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시적 성취의 기준은 그 양쪽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어떤 경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야만 시는 언제나 자기 갱신적인 양태로의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것만이 시의 내구성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시를 인간만의 사업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취향의 무정부상태가 취향의 다양성과 동의어로 인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취향의 다양성을 즐기는 일은 오히려 취향들에 대한 강력한 집중을 통해서일 것이다. 자기갱신적인 양태로 자기완성을 이루는 일은, 낯선 것, 다른 것과의 겨룸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겨룸이 언제나 사육제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자기갱신적인 양태로 자기완성을 이루는 일을 말을 바꾸면 타자몰입적인 방식으로 자기집중을 이루는 일인 것이다.

나는 이형기 문학상의 제정을 이형기 선생 특유의 시세계를 연장하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나에게 그것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인생파적인 시의 축연을 뜻한다. 본심에서 논의된 많은 시인들이 이형기적인 것과 나름의 관련을 맺고 있는 건 틀림없다. 특히 김명인 선생의 새 시집 파문은 제 1회 수상작으로 썩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령,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꽃뱀)같은 잠언적 통찰에서도 증명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장황히 늘어놓은 오늘의 현상을 한 편의 영상으로 압축해 놓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얼마나 고단하게 인생을 노 저을 것인가

자꾸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는

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시대의 기준인지 어림할 수 없겠다

다만 거품을 넣을 때 잔뜩 부풀린 머리 끝까지

하루의 피곤이 빼곡이 들어찼는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저렇게 쏟아져 나오다가도

손바닥에 가로막히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는

시간이라는 하품을 나는 보고 있다! (조이미용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