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4년 '현대시 신인상' 추천사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04년 '현대시 신인상' 추천사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19

박정석씨의 시는 우리가 흔히 전통적인 서정시라고 부르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자기 세계를 갖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가 언어를 다루는 솜씨는 우물 깊은 곳에 감춰진 고운 진흙을,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고르는 정교함을 가지고 있다. 우기(雨期)에서 집 안에 갇힌 자의 권태를 끈적거리는 분비액을 흘리는 달팽이로 표상하고 그로부터 눈동자만을 취해 바깥의 장마에 대항케 하여, 안팎으로 벽에 부딪친 존재가 우주의 바른 결을 찾을 숨구멍을 하나 뚫는 과정의 섬세한 묘사는 씨가 시에 공들인 시간이 적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때로 시적인 것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모든 삶을 그것을 부정하는 표지들로 채우게 될 수도 있다. 사실들이 놓일 자리를 족족 비유로 수놓다가 문득 삶과의 긴장을 상실할 때 시의 언어들은 공허히 번쩍이는 허공의 수사학으로 그칠 수도 있다. 그 점을 유념하고 정진한다면 언젠가 씨는 시의 실체를 쥐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