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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시인들을 회상하며 - 이윤학, 주창윤의 새 시집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1990년대의 시인들을 회상하며 - 이윤학, 주창윤의 새 시집

비평쟁이 괴리 2021. 8. 20. 20:38

 

아래 글은 포에트리 슬램8(2021.06)에 발표한 글이다. 잡지가 나온지 시간이 꽤 경과했다고 판단하여, 블로그에 싣는다.

 

1. 옛 시인들이 된 이들의 시집

 

옛 친구들로부터 두 권의 시집이 도착했다. 이윤학의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과 주창윤의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라이더(한국문연)이다. 나는 이 시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주창윤 시인은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저 혹독한 시 가뭄의 시대, 1990년대의 시베리아를 우리는 시를 끌어안고 통과했다.

우리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기나긴 20여 년의 적막 끝에 2010년대 후반부에서부터 시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90년대 시인들의 고투 끝의 성취가 아니라 디지털 기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짧은 글의 풍조를 크게 퍼트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되살아난 시들은 옛날의 시와 성격이 크게 달랐다.

오늘의 시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나는 옛 전우들의 시를 좀 더 느끼고 싶다.

1990년대의 시인들의 상당수는 지금 거의 절필 상태다. 김갑수, 유하, 김태동, 함성호, 차창룡, 조은, 김휘승, 연왕모 이정록……

죽은 기형도가 신화의 전당에 들아가는 동안, 이들은 가뭇없이 시의 페이지에서 말소되어갔다. 이들의 소실에 가장 강력한 압박을 가한 것은 문학의 상업화 경향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그 정황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불가피한 추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상업화는 한국인들의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신분상승이라는 민주화 바람을 동반하면서 확산된 것이었다. 이 개인화가 이득interest’을 향한 질주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자연스런 추세이다. 이 경향에 대해 반성적 장치를 부착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인데, ‘불마켓을 지속한 이 돌풍을 잡아제치려는 문학의 태클은 겨우 개미의 저색(齟齚)에 지나지 않기가 십상이었다.

 

2. 사라져선 안 될 사람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문학인들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진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이 개인들의 폭발이라는 경향 자체가 개인들을 억압하는 시기가 필경 온다는 것은 역사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지금 눈 앞에서 생생히 확인하는 사항이다. 오늘의 상황은 개인의 욕망이 권리의 자격으로 폭발하여, 작은 개인들을 말살하는 시기이다. 그것을 두고 90년대의 시인 성윤석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만인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만인의 펜과 만인의 마이크를 쥐고 만인을 향해 소리 지른다 만인이 만인의 멱살을 쥐고 만인이 만인을 비웃으며 만잔의 술을 비운다 이럴 때 만인은 각자의 만인 각자의 만인끼리 사랑하고 헤어지고 비난하며 뛰어다닌다 (「검은 개인[1]」, 부분)

 

이 만인들은 개인들의 형성물이다. 이들이 개인으로서 존재할 때 신인류는 이제 불행을 매수하지 않았고 내버려둔 채 세상 최후의 고독을 살”(21701223[2])게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지구상 생명의 진화는 개인들-만인의 단계를 넘어설 때에만 새로운 단계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계는 개인들을 생명으로 확대하고, 다시 생명들을 정신활동을 하는 물질들로 재정의하는 작업에 의해 새로운 종의 출현을 준비할 것이다.

이러한 진화의 바른 방향에 나는 90년대의 시인들의 작업이 여전히 유익한 지침으로 작용하리라 나는 믿는다. 나는 당시의 시 경향을 일별하는 자리에서 이들이 사물들의 윤리학[3]으로 가고 있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개인의 현상학적 환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야 생명과 광물과 인간이 공평해지고, 그 바탕 위에서 공진화의 터전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들의 윤리학의 물풍선을 마구 터뜨리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사물화는 에너지 준위를 낮추는 데 비해, 인간화는 높이는 쪽이라서 현실 쪽이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물풍선들의 폭죽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이 인간들의 실상은

 

신장개업 음식점 앞에서

바람 잔뜩 들어간

키다리 풍선 인형이

미니스커트 아가씨와 함께

관절 꺾는 춤을 추고 있다

[……]

해 떨어질 때

다리 풀리고 풀 죽은 거죽만 남아 말없이 제정신도 아닌

헛바람 허수아비 (김중식, 「키다리 풍선 인형[4]」, 부분)

 

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진단은 앞에서 본 성윤석의 상상과 맞물린다. 그러니 사물들의 윤리학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과제이다. 90년대의 시인들이 상당수 그 과제를 더 밀고 나가지 못한 사정에는 평론가들의 잘못도 컸다. 정치경제학에 갇힌 좁은 시야, 시인들의 유추적 사고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마다의 사업에 갇혀서 직무를 등한시한 것. 나는 시간에 쫒겼다고는 했지만 읽기를 좋아했으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지나친 시인들이 수다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자주 간지럽다. 특히 방금 인용한 김중식과 김휘승이 그랬다. 김중식이 캄 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이탈한 자가 문득[5])는 기발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태양을 집어삼키고”(땡볕[6])자 했을 때, 응원하면서 그 충동이 자폭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폭발할 수 있도록 엄호해야 했다. 혹은 나는 김휘승을 직접 발견했으면서도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물음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를 숨 막바지에 텅 빈 하늘”(사람?[7])에 방치하고 말았다. 그런 게으름이 결국 내가 현장에서 멀어지는 나날 속에서 늘 조용히 숨어 있던 그가 서서히 잊혀져가게 한 바탕을 조성한 것이 아니었던가?

 

3. 컴컴하고 난처한 시골 물상

 

여하튼 이 가혹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시를 써 온 90년대의 시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윤학은 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부리와 발톱들을 쭉 뻗은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 새를 보았다 새는 멈춤 자세로 최대의 길이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 최대한 부리와 발톱들을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마침표였다.

 

그는 시인의 운명을 현실이라는 이 강력한 중력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그 결과가 이 시집에 빼곡히 들어 있는 시골의 물상들이다. 그는 이 물상들과, 또한 그것들에 거의 한 통속으로 변해버린 시골 인간들을 버무려, 도시 독자들에게는 참으로 난해하고도 난처한 이물처럼 내던지고 시치미를 뗀다.

 

아궁이의 불티가 토닥거리는 소리를 북방의 어느 별에서 움트는 싹이나 느지막이 피는 꽃이나 저공으로 나는 나비와 벌들의 날갯짓으로 차용해 사용했다 그런 새벽에는 어김없이 얼어버린 눈곱이 끼었다 부뚜막은 두툼한 얼음으로 바뀌고 고양이는 아궁이로 들어가 폐가에서 뜯어낸 목재들의 미열과 소통했다 구부러진 못들이 재를 덮고 식어가고 있었다 진폐증을 앓는 남자가 움켜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궁이[8]」 부분)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배경에 은근히 깔고 있는 이 시에서 인용된 시구의 첫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그 주체는 아마 화자일 것인데, 주어를 생략한 것은 그 존재를 백석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반성적 주체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미 없는 존재자로 마냥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양은 물론 전락의 꼴이지만, 그 운동은 시의 본문 안으로 진입하여 화자가 아니라 인물이 되는 놀라운 결과를 현상한다. 그는 진폐증을 앓는 남자로 시 무대의 한 역을 담당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그는 전락한 자이니, 화자의 지위에서 인물의 지위로 가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덕분에 묘사하는 자, 즉 애처로이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현실에 대해 무언가 작용을 하는 자로 변신한다.

 

그는 붉게 다려진 못이었다가 마른 기침이었다가 바싹 마른 폐가의 나무토막이 되었다 식은 장판 바닥을 더듬었다

 

그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한, 현실은 여전히 불편할 것이다. 그 불편함이 독자에게는 성찰의 실마리다.

 

4. 비유를 넘어 명징한 언어를 향해

 

반면 주창윤은 시인의 말에서 침묵이 너무 길었다라는 맺음말로 귀환을 선언한다. 그가 왜 침묵했을까? 그는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지목한다.

 

언어의 안개를 명징하게 걷어내고 싶었다.

날것을 명쾌하게, 표면적으로

그냥 입에 녹듯이,[9]

 

이 고백은 변신의 표명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첫 시집의 제사에서

 

나는 지금 이곳의 그 사이에 서 있고 싶다.

 

라고 표백하고, 첫 시에서, 자신의 삶을 저녁 강에 비유한 바 있다.

 

자기를 밀어내 妙표를 쌓은 강은 아름답다.

갈대구름은 그곳에서 피어난다.

은어 풀어주기 전에

먼저 젖지 않으므로

천천히 물 위로 나를 벌어내는 저녁 강

나는 가라앉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내어 생을 이룬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저녁 강[10]」, 전문)

 

제사를 참조하며 이 시구를 읽으면, 그에게 비유는 통상적인 비유의 정의를 갖지 않는다. 객관적 상관물’(T.S. 엘리어트)의 형성이 아니다. ‘는 강에 완전히 동화되고자 강 속으로 들어가지만, 강은 저 자신을 밀어 냈듯이, ‘를 밀어낸다. 나는 거기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스스로를 파내어 생을 이룬 강흐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각성을. 이로부터 그의 비유는 대상의 표면으로부터 그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의미를 캐내고자 하는 추적이 된다. 비유는 의미를 느낌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느낌에서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시집은 이제 그 방법론을 철회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그는 언어의 안개를 걷고 명징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선회가 표면의 삶, 즉 현실에 대한 투항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게 아니라, 시인은 문득 표면의 삶 자체가 딱딱하게 굳은 현실이 아니라 요동하는 길항의 무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길항의 무대를 그에게 알려준 것은 제목이 가리키듯 배민 라이더이다.

 

배달이 밀리는 추석이다.

퀵서비스 맨이 갈비 세트와 특상特上 나주배 상자와 양주병을 가득 싣고

질주한다.

그의 어깨 너머 추석 보름달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짓누른다.

특상 나주배 같은 달의 무게가

중심을 잃게 만들었나?

사거리에서 넘어진 오토바이

바퀴는 계속해서 헛돌고

쓰러진 퀵서비스 맨은 일어나지 못한다.

깨진 양주병에서

터진 보름달이 흘러내려 아스팔트를 적신다.

달은 그렇게 노랗게 흘러내리고 있다.(「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맨[11]」, 전문)

 

이 아프고도 아름다운 시에서 시인은, 현실이 힘겨운 노동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상처 입히지만 노동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엄혹한 진실을 명징하게 전달한다. 그는 비유를 아예 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비유로 기능하지 않은가, 라는 물음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달은 배민 라이더를 환하게 비추는 광배일 수도 있다. 즉 오토바이 운전자의 노동에 대한 찬송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이 시에서 비유는 현실을 대체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유는 현실을 포장하지(감싸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의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광경을 드러내고 있다. 달은 무거워져 추락하고, 현실과 부딪쳐 운전자를 나뒹굴게 만든다. 비유은 현실의 한 조각으로 현실에 흡수되어 버리면서 현실 안에서 덜그덕거린다. ‘배달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의 비유화가 아니라, 비유의 현실화를 통해서, 시인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싸움의 전선을 찾은 것이다. 그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글을 메지내면서 나는 1990년대 시의 생환의 기미를 느낀다. 1990년대 시인들은 당시 봄날의 꽃들처럼 마구 피어나는 욕망이 팽대하는 현실 앞에서 죽음의 자리를 찾아감으로써, 훗날의 파국에 대한 경고이자 피난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외양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싸움은 거의 패배로 끝나갔지만, 그러나 투쟁의 대의, 내가 사물들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했던 그것은 여전히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현실이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 늙은 귀환 장정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의 실제적 성취는 아주 다양한 변신 끝에 나오겠지만, 그들의 어떤 작업들도 지구상 생명의 진화를 공공선의 확대로 끌고 가는 일에 일말의 기여를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물론 오늘 다룬 이들만이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니다. 다른 도전들도 다른 지면에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________ [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성윤석 시집, 21701223, 문학과지성사, 2019, p.69

2) 같은 시집, p.12.

3) 무덤 속에서도 시는 꿈꾼다 90년대의 시, 무덤 속의 마젤란, 문학과지성사, 1999, p.358 이후.

4) 김중식,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사, 2018, p.36.

5)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2011[초판: 1993], p.11.

6) 같은 시집, p.55.

7) 김휘승, 햇빛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1993[초판: 1991], p.11.

8) 이윤학,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안동: 간드레, 2021, p.18.

9) 주창윤,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2021.05, p.5.

10) 주창윤, 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 민음사, 1989, p.9.

11) 같은 시집,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