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

비평쟁이 괴리 2020. 12. 8. 10:33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11)는 유년의 시선을 탁발하게 응용한 시집이다. 여기에서 유년이란 통상적으로 가정되는 천진난만, 즉 순수성을 내장한 존재로 이해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해석된다. 어린아이는 순수하다고 하기보다는 호기심이 많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어린아이는 처음 세상을 접하면서 그 모습에 신기해하고 무언가 알고 싶어하고 더 나아가 거기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도 배우질 못했고 세상을 다루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린아이는 낯선 대상을 만나면 다가가고 싶은 충동에 강렬히 이끌린다. 이런 상태의 유년은 행동성은 최소화된 반면 가능태는 최대화된 존재이다. 그때 아이의 충만한 가능성은 터지기 일보 직전, 즉 행동의 무한에 근접한다. 그게 어린아이의 표정, 손짓, 몸짓의 신비이다. 안태운의 시 하나하나는 바로 그런 상태의 인물의 모습을 생생히 표출한다.

 

공간 속에 멈춰 있었다.

이 공간을 구성하려 하나.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나. 나는 이 구도 속에 있는 것들을 나열하고 그러니까 그것은

모과나무, 모과나무의 가지를 무는 것, 물어서 흔드는 것, 전선 속으로 흘러드는 것, 녹, 녹과 입술과 진물, 사람과 또 다른 사람 그러므로 두 사람이 있고, 막, 막 사이 틈으로 쓸려서 밖으로 나가는 저녁놀. (「이후」)

 

그러니 이 시집 속의 시들에서 가장 수일한 이미지들은 시의 화자가 호기심을 갖고 다가간 대상에게 손을 막 대보려는 찰나에서 포착된 순간의 형상들이다.

 

거울이 탐방로를 담는다

거울이 옷을 담고

거울이 안개와 밭을 담고

그 거울을 이어 붙여보고

담은 것들을 네 거울처럼 대하면

너는 흘러가는구나

흘러가본 너는

조금씩 거울을 남기는구나

거울은 일기 日氣를 담는다

거울은 계절을 담는다

네 신체를 떠돌지

흘러가본 거울

또 거울을 흘러가서 (「흘러가본 거울 또 거울을 흘러가서」)

 

모든 것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온갖 놀이가 한없이 흘러간다. 이런 형상들 앞에서 독자는, 거리에 나와 아장아장 걸으며 무언가에게 다가가는 순간의 아이를 볼 때 터뜨리는 탄성과 똑같은 것을 터뜨리게 된다. “어머, 어머, 귀엽기도 해라그리고 아이를 만지고 싶어하듯이 시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실제 어린아이에게는 조심하시라, 자칫 아이 엄마에게 뺨 맞을 수 있다. 시의 독자는 주의 깊게 살피시라 지면을 뚫고 시의 주인을 손으로 만지려면 정밀한 독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여하튼 그렇다 이런 시구 앞에서 에구구구 어쩜 이렇게 이뻐요?!”라고 외치면서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런 독자에게서는 미안하지만 감수성의 부족을 의심해야 하리라. 어린 아이 앞의 어른과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 독자도 똑같이 어린아이 비슷한 사람이 돼보고 싶은 것이다. 시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지만 극도의 조심성을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손을 대는 순간 그 아이는, 그 시의 풍경은 사라지고 마니까.

너는 손가락으로 풍경을 건드려보지만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는군요. 소리가 없군요. 너는 네 목소리 를 내봅니다. 네 목소리를.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면 서. 그렇다고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습니다. 너는 네 목 소리 뒤로 돌아 나가는군요. 이제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나요. 그러면 거기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목소리」)

조심히 다가가지 않으면 신기루가 된다. 그리고 신기루를 보는 마음엔 주름과 굴곡이 생긴다. 이 시집은 탄성도 재촉하고 사색도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