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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집 읽기

천양희와 이민하의 새 시집

비평쟁이 괴리 2021. 9. 19. 09:28

※ 아래 글은 현대시학』 2021년 7-8월호에 실린 글이다. 과월호가 되었기 때문에. 블로그에 싣는다.

시의 숨은 힘

 

풀아 날 잡아라

내가 널 당겨 일어서겠다

(천양희, 「풀 베는 날」『오래된 골목』, 창작과비평사, 1998, 9쪽)

 

천양희 시인의 이 시구를 읽은 게 20년도 넘었습니다. 시인은 풀을 베다가, 베어진 풀의 죽음이 다른 생명들의 거름이 되는 걸 생각하다가, 풀의 희생을 추념하다가, 문득 그게 아니라 풀이 단순히 제 목숨을 바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원소를 제 몸 안에 들인 존재들의 몸 안에 새로운 생으로 깃든 것이라는 생각에 눈이 뜹니다. 그리고는 그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풀의 신생이 참된 의미를 얻으려면, 그걸 소화한 이가 그 내력을 되새기며 그 의미를 빚어내는 노력을 할 때만이 그럴 수 있으리라는 깨달음에까지 이릅니다. 방금 인용한 마지막 두 행은 그렇게 해서 씌어진 시구였던 거지요.

당시에 이 시를 읽으면서 제 몸에서 일었던 놀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시구는 존재 간의 상호성이라는 실천적 명제의 가장 완벽한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풀을 당기는 일은 대체로 풀을 뽑는 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시인은 거기에서 정반대로 풀도 살리고 자신도 원기를 충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니, 풀의 잡음의 세기와 의 당김의 정도가 얼마나 주밀히 조정되어야 하는지요? 이는 외계탐사우주선을 쏘아올리는 데에 필요한 것과 맞먹는 극도의 정밀도를 요구할 것입니다.

갑자기 이 시구가 추억된 것은 천양희 선생의 새 시집, 지독히 다행한(창비, 2021.03)을 읽고 있으면서 그때 느꼈던 상호성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령 첫 시 두 자리

 

붉은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같은 구절에서 보이는, 두 자리의 동시성과 길항의 공평성이 키우는 삶의 크기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라며 바람과 꽃의 저마다의 개별성과 유관성을 동시에 제시하고는,

 

바람 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그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 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로 메지나는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에서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삶의 하찮은 편린들을 날개 달린 미립자들로 둔갑시켜 삶의 육중한 덩어리에 삼투시키고는 그 속에 서늘한 쇄신의 혈액을 돌게 하는 그 솜씨를 말입니다.

요즘 세상은 현실 세계가 상상 세계보다 더 박진한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리얼리티 안에서는 격렬한 충돌만이 코로나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언제 자멸할지 모르는 채로 그저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이민하가 얼마 전 상자한 미기후(문학과지성사, 2021.05)도 이 정신의 코로나에 대해 거듭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의 이미지들은 너무 밝은 세상에 드리운 불길한 재앙의 그림자들입니다.

 

우리는 11층을 지나고 있었네

너는 창유리 안에서 나는 창밖에서

 

안과 밖이 바뀔 때에도

얼굴이 서로 바뀔 때에도

거울처럼 투명한 어둠 속에서

 

불안과 위안이 앞뒷면처럼 겹치고

손을 잡은 행위와 손을 놓은 이유가 동시에 스치고

 

우리는 11층을지나고 있었네

반짝이는 숲에는 구릿빛 새들

계단은 9층에서 끝이 났는데

 

그러나 우린 똑같이 두 팔을 펴고 믿음을 펄럭이면서 (「천국의 계단」)

 

사람들은 번쩍이는 숲에서 두 팔을 펴고 믿음을 펄럭이면서황홀히 날아갑니다. 그러나 계단은 9층에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의 활공은 거울처럼 투명한 어둠속에 박힌 정지화면입니다. 세상의 환한 거울들은 벽을 증명하려고” “종일 서 있을”((wave) 뿐입니다. 저 위에서는

 

어두운 백척간두 일인실에 누워

신은 우리를 창밖에 매달아두고 잊어버린 .(「하류」)

 

모양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함이라고 가정된 존재는 치매 상태로 투병중입니다.

이 거짓된 밝음 속에서 시인은

 

화들짝 감추는 귓속말처럼

하루하루 반성문을 쓰듯 떨어져 앉은

밤과 밤처럼 (「생활」)

 

간신히 다문다문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숨어도 발각되고, ‘의 딱지를 달고 걷어차입니다. 이런 밝음의 폭력은 그것이 결국은 우리 바깥에, 우리 위에 군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진리의 이름을 단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 곳곳을 탐조등처럼 비추며 홍염의 혀로 우리를 태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서 불의 세례를 받은 줄 압니다.

시를 따라 읽다 보면, 우리는 밝음이 우리 안으로 깃들어 우리의 혈액으로 돌아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색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슴프레한 밝음입니다. 부족함을 머금은 충분성, 그래서 상대방과의 긴밀한 배려를 통해서 조성되는 상호성의 색깔입니다. 시의 독자를 원하는 까닭은 그런 참된 유대의 숨은 원리를 시가 몸소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시를 입맛대로 써먹는 걸 즐기는 시대입니다. 시의 힘은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느끼려면 오래 보고 오래 씹고 오래 느껴야 합니다. 오늘의 시들은 이 사태 전체를 증거하면서, 시의 숨은 힘을 독자들이 스스로 겪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