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강은교의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강은교의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비평쟁이 괴리 2020. 11. 23. 23:39

강은교는 한국 시사상 가장 주술적인 시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시종이 없는 무한의 노래로 들린다. 이 무한의 노래는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지고 이튿날 아침 햇살에 바톤을 넘기고는 다시 저녁에 시작되는 일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해서 오늘에서 고생대 사이의 무한 순환으로 나아간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푸른 세포들이 그윽이 등불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행에 둘러싸인 창틀들, 웅얼대는 벽들

 

      어둠을 횡단하며 양파는 자라납니다

      그리운 지층을 향하여 움칫움칫

      사랑하는 고생대를 향하여 갈색 순모 외투를 흔듭니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움칫움칫 걸어나오는 싹

             시들며 아이를 낳는

             달빛 아래 그리운 사랑들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창비, 2020.11 )

 

하루의 순환과 지구의 순환을 들여쓰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분을 따라가면, 지구의 순환은 사랑의 순환으로 확장됨으로써 궤적을 바꾼다. 그러니까 사랑은 우주다.

이 계단형 무한 반복을 노래로 만드는 것은 그 순환의 리듬이고, 이 노래를 절창으로 만드는 것은 그 리듬의 유장함이다. 그 유장함은 어법, 어휘, 비유에 대한 시인의 매우 감성적인 선택들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이 언어의 움직임에 주입되는 연료가 슬픔이라는 것이 그 이후의 모든 것들을 결정한다. 시집의 제목이 그 사실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 못 만져본 슬픔은 타자의 슬픔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슬픔이다.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내 뼈에 있는 그곳

만져도 만져도 또 만져지는

언제나 첨보는, (「아직도 못 가본 곳이 있다」)

 

라고 노래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 슬픔은 내 안에 깊숙이 심겨져 있는 것인데, 아무리 만져도 여전히 안타까운, 그래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그런 슬픔이다.

바로 이것이 시인의 존재를 슬픔의 권화로 만들고, 이때부터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슬픔의 하방, 슬픔의 노래이다. 그리고 이 내 안에서 항상 새롭게 솟아나는 슬픔은 시적 진술의 계단형 구성에서 감각적인 상응물을 만난다.

즉 그녀의 슬픔은 주제로 보아 필경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게 되고, 그 수량은 점점 커져 폭포를 이루게 될 것인데, 그 흐름의 연속성에 수량의 증가를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 커다래진 물더미로 하여금 무언가 다른 행동을 하게끔 하는 여지(반등을 준비하는 시공간)를 조성하는 것이 방금 앞에서 본 바와 같은 형태의 계단형 반복이다.

즉 강은교의 폭포는 김수영의 폭포가 보여주었던 직각으로 떨어지는 폭포waterfall가 아니라, 서양의 장원(莊園)에서 볼 수 있는 계단들 아래로 거듭 떨어지는 폭포이다.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계속 아래로 발을 내딛는 듯한, 혹은 빠뜨리는 듯한 그런 하강의 폭포cascades. 김수영의 폭포번개와 같이 떨어지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는다면, 강은교의 계단형 낙하는 잠시 멈추면서 마음의 물을 더 채워서, 물의 수량을 한없이 늘려 나가는 그런 물의 흐름이다. 여기에서 물은 그 안에 느낌과 생각의 기포들이 보태져, 슬픔이 유발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감정과 인식과 판단 그리고 세계구상까지 포함하는 그런 마음-머리의 움직임과 그 산물들을 낳고 끌어 모은다.

 

 

그런 생각의 끝자리에서 슬픔의 거듭된 하강은 거꾸로 계단을 뛰어오르며 부활하는 몸짓을 꿈꾸도록 시인을 추동할 수도 있으리라. 과연,

 

나 늙고 늙었다

흰 머리칼 시간의 장대에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인다

쭈글거리는 살은 어둠의 장식 같은 것

혀는 꿈꾸고 꿈꾼다

돌의 날개밭을

지층들이 부활의 동굴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어느 밤엔가는 천둥소리 흩날리며

번개의 은빛 장대 휘두르리 (「청계폭포」)

 

시인은 정확히 이 부활이 폭포로 구성될 것임을 몸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이 폭포가 계단형임을(제목이 청계폭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여기에서 작동하는 것은 의미 연관이 아니라 음운의 일치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하고 라캉이 상세화했던 하나되는 표지trait unaire’에는 엉뚱하고도 사소한 일치외에 다른 법칙이 없다) 가리킨다. 계단은 내리락오르락하는 것이다. 추락이 상승이 되고, 몰락이 승전이 되는 것이다. 김수영의 폭포가 각성(현실인식)의 폭포라면, 강은교의 폭포는 꿈속을 달리는 은하철도다.

한 가지 의문점은 이런 슬픔의 근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 여린 감성으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힘든 개인사를 겪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시집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크기는 개인을 훨씬 넘어선다. 이 규정되지 않는 거대한 슬픔은 고난의 역사를 치러낸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종족적 고난을 제 몸 안으로 삼투시켜 만들어낸 실존화이다. 소설가 정찬은 슬픔의 노래에서 깊고 깊은 슬픔의 강이 언제나 인간의 역사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아늑한 길, 1995, p.241)라고 쓴 적이 있다. 종족의 고난은 시인의 몸 안을 가로지르며 깊고 깊어지고 높고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