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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의 수량적 방대함의 근원

비평쟁이 괴리 2021. 7. 6. 15:36

※ 아래 글은 지난 토요일(2021년 7월 3일) 경기도 안성의 '조병화 문학관'에서 '조병화 그의 시'라는 주제 하에 발표한 글이다. 오후 2시부터 전상국 선생이 스승과의 추억담을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내가 발표하였다.

 

1. 양산과 여유

 

조병화 선생은 53권의 시집에 3327편의 시를 남겼다[1]. 이는 엄청난 숫자다. 평균하면, 59(1947-2005) 사이에 매 해 56 편 이상의 시를 쓰셨다. 게다가 연배가 늘어날수록 시의 양이 많아졌다는 것도 흥미로운 특징이다. 조병화 시 전집6권은 각각 13(전쟁기간 포함), 9, 8, 9, 7, 9년 주기로 나뉘었는데, 각 권에 수록된 시들은, 차례로 271, 496(370), 375(321), 630, 755(698), 742(599)이다[2].

이런 대량생산을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대량생산을 물리적 속성으로 규정하면 다양성과 풍요함이다. 따라서 시인이 내장한 힘과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의 다양성이 앞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넓이의 문제이다.

넓이를 다시 인간의 마음 자세로 환원하면 여유라 할 것이다. 조병화 시인은 여유있는 분이었다, 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시인도 말년에 자신의 삶을 그렇게 규정하였었다.

 

내 인생 지금 80,

이것을 시간으로 따져서

그의 1/3은 기다림이었고

그의 2/3는 그 일의 실천이었다

 

마음의 편안, 그 여유, 그 안심 ,

그 일의 정확한 실천, 그 사색을 위해서

 

이것이 나의 인생,

이것도 나의 성격이었겠지. (시간배당 김포공항에서 9A.M., 전문[3])

 

한데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유라는 마음 자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기획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여유는 노동(“그 일”)이며, 실천과 사색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유인가? 다른 시에서 시인은 여유를 소망하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여유 있게 보일 수 있는

느긋이 보일 수 있는

멋을 보일 수 있는

나도 그러한 행동을 하면서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아, 그러한 시간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라.(시간의 피고, 부분[4])

 

그렇다면 시인에겐 실제로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위 시에서 그 점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부재한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제목이 가리키는대로 시간의 피고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실로 그의 그 많은 시에서 여유라는 단어가 나오는 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시간이라는 단어는 제목에서나 시구에서나 무수히 등장하며, 상당부분 시인에게 구속으로 작용한다. 가령, 초창기의

 

영 반복하지 않는 시간 속에

실패를 반복하는 나의 청춘이 (열차를 놓치고, 부분[5])

 

같은 시구에서부터, 말년의

 

열고, 헤치고, 다시 열어온 어제는

첩첩이 밀폐한, 내가 쓴 캄캄한 나의 시간

 

그 밀폐한 시간 속에서

나는 풀리지 않은 가슴으로 묻혀 있다

 

생생히. (오늘을 살며, 부분[6])

 

에 이르기까지, 그는 거듭 시간에 휘둘려 살아 온 것이다. 그에게 시간은 상실 그 자체이다.

 

오, 시간이여

상실이여

 

푸른 방파제 끝머리 , 잃은 시간 속에서

나를 그린다. (잃은 시간 속에서, 부분[7])

 

그래서 그는 시간 밖 저쪽에서 나를 찾는다.

 

지금 무수한 내가 흐트러진 채

지구 그 자리

시간 밖 저쪽에서 나를 찾고 있습니다

 

시인이란 만인의 벗이라는데

나의 가슴은 이렇게 어리고 가난합니다(굿바이, 부분[8])

 

이러한 시인의 인간적 실상은 시의 양산이 암시하는 여유와 상반된다. 이렇게 시간에 쫒긴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리도 많은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여유가 하나의 의도적 기획의 산물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미 첫 번째 인용한 시에서, 그런 양태를 확인하 바 있거니와, 방금 인용한, 시간에 쫒긴 삶을 묘사한 시구들에서도 그런 생각을 어림할 수 있다. 가령, 오늘을 살며에서 밀폐한 시간생생히느낀다고 말하는 건, 시간의 전횡이 일어난 사태를 자신의 것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의 표현이며, 잃은 시간 속에서는 시간=상실의 정의에 이어 곧바로 씌어진 잃은 시간상실의 상실을 통한 의 추구(“나를 그린다”)라는 행동의 개시를 슬그머니 알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용된 시구는 시간 밖 저쪽에서 나를 찾는 행위를 자기 시의 유년에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시의 생산의 원천을 시간 밖으로의 탈출로서 적시하고 있다.

 

2. 여유 기획의 알고리즘

 

아마도 조병화 시인의 시 생산의 대량성은 이런 깨달음을 아주 일찍부터 얻었고 그것을 하나의 구성적 기획으로서 변환시킬 수 있었다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기획은 실제 어떤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졌나? 이 글에서는 그것을 그의 초기시를 대상으로 해서 찾아보고자 한다.

전집에서 첫 시로 수록된 목련화는 그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철학 개론일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잖는 추억같이 피었어라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乙男이는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이었어라

 

황홀한 花冠에

사월은 오잖는 기다림을 주어 놓고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

호올로 (목련화, 전문[9])

 

이 시의 정황은 배경은 단순하지만 그 묘사는 까다롭고, 그 까다로움에 의해서 의미가 중층적으로 두꺼워졌다.

우선 을남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다. 이 여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망가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모습에 대해 누군가 나무랄 법도 하다. 그런데 화자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 생각을 철학 개론일랑 말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고답한 관념으로 생생한 사연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삶의 진실성이 도덕의 위선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 여성의 사연은 지나간 남풍으로 지시되어 있다. 한편, 그 남풍이 지나간 뒤, 여인에게 남은 결과는 혼인의 실패이다(혹은 혼인이 가능한 여자의 사회적 조건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여인은 남풍을 잊을 수 없다. 성취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익잖는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주목할 장소이다. “피었어라라는 동사가 저 추억의 좌절을 의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익잖은 꽃도 꽃이다. 그러니까 '을남'의 소망은 그냥 좌절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의 형태로 현존한다.

다음 연에 가서, ‘남풍이 시간 명사로 변환되었다. 남풍이 불었던 때는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이었다. 그날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가 되었으리라. 이 대목은 두 가지 의미를 감추고 있다. 우선, '을남'의 좌절이 혼인의 실패를 가리킨다는 점이 강하게 암시되었다는 것이다. “흰 블라우스는 혼례복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화자에게 을남베아트리체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일 것이다. 즉 화자에게 그녀는 구원의 여인이다. 그렇다면 '을남'이 하려 했던 혼인은 나와의 혼인이었던가? 그리고 '을남'의 좌절은 결국 화자의 구원의 실패와 동의어인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화자는 최종적으로 발언을 유보한다. 화자의 묘사는 '을남'에게 오로지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사태의 시간화가 유발하는 효과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주제가 아니라 기법에 관여한다. 3련에서 '을남'이 목련화가 되는 일은 가정법으로 제시되어 있다. “입으면 이었으라.” 이 어조는 아쉬움을 진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제 4련으로 건너가면서 아쉬움은 심리적 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심리적 현실이 실제 현실 속으로 삼투해 실제 현실을 변경한다. 을남은 목련화에 투사된다. 그래서 목련화-을남은 이미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났었다는 직설법 반과거형으로 제시된다. “황홀한 화관에 그 최상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지고 있다.

아쉬운 가정법의 현실과 완료로서의 심리적 현실태의 일차적인 차이는 전자에서 을남은 가장 아름다울 기회를 놓친 반면에, 후자에서 을남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적이 있었다, 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무슨 효과를 낳는단 말인가? 언뜻 봐서는 이 차이는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을남'의 아름다움은 이제 정상에서 추락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다시 보자. 한번 완성된 아름다움은 재림을 열망케 하는 절대적인 근거이다. 그것을 한 번 본 사람은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할 때에도 그것의 도래를 기다린다. 바로 거기에 이 차이의 핵심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 련 두 번째 행에서 사월은 오잖는 기다림을 주어놓고라고 썼다.

을남-목련화의 성료된 개화는 기다림을 주었다. 이제 그것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다림은 계속 이어진다. “사월은 바로 그 연속성을 부여하는 염기이다. 우리는 4월만 되면 목련화가 피어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오지 않는 을남의 개화는 목련화에 기대어, 올 것으로 전제되고 그것이 오잖는 기다림을 지속시킨다. 이 기법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최초로 등장했던 기법이다. 영랑이 상정한 이상적 세계는 모란에 투사됨으로써 그저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끊임없이 피었다 지고, 졌다 피는 세계로 바뀌었다. 영랑은 이 투사를 통해, 기다림을 하나의 실천적 태도로 만들어내었다[10].

그런데 조병화 선생의 이 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잖는 기다림에서 기다림의 주체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화자는 을남의 생애만 기록하였다. 그런데 오잖는 기다림의 표현을 통해 주체가 을남으로부터 다른 이에게로 선회한다. 이 표현의 정확한 진술은 오지 않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다. 여기에서 주객이 분리된다. 오지 않는 것[]가 있고, 그것을 기다리는 자가 있다. 오지 않는 이는 당연히 한번 황홀하게 피어났던 을남이다. 그 순간에 을남은 자신이 할 일을 다하였다. 다음에는 단지 되풀이가 있을 뿐이다. 그 되풀이를 매 순간의 신생(새로운 개화)으로 바꾸려면, 그것을 그렇게 소망하는 자, 즉 기다리는 자가 별도로 필요하다. 이미 개화를 완성한 을남호올로질 뿐이다. 그 호올로 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지네 지네는 단순히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탄식이다. 묘사라면 체로 기술되었을 것이고, 또 한 번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잔뜩 실린 종결어미로 처리되었고 그것도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이 때의 반복은 정서의 강화에 기여한다.) 이 발언이 화자의 그것이라면 화자는 시방 객관적 묘사자로부터 내부자로 변신해 사건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잖는 기다림은 그 모호한 표현을 통해 일단 을남에게 주도권을 남겼다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행할 뜻풀이를 통해 화자에게로 주권을 이월시키게끔 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단 화자에게 역할이 주어진다. 그 역할은 적잖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기다림을 실행해야만 호올로 지는 을남[다시] 피어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좀 더 온건하게 말하면, 이 절차를 통해 화자는 '을남'의 좌절을 갱생으로 만들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라는 탄식은 화자의 마음 속에서 아름다운 것은 마침내 피어나도록 해야지라는 다짐으로 변환된다. 이 다짐 속에서, 저 앞에서 유보했던 질문, “을남의 좌절은 결국 화자의 구원의 실패와 동의어인 것일까?”라는 질문이 절실하게 울린다. 내가 을남의 꽃핌을 강렬히 바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의 구원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한 까닭은 없다.

 

3. 현상의 전복과 상호주관성의 구성

 

목련화는 사랑의 좌절이라는 흔하디 흔한 사건을 갱생의 드라마로 바꾸었으며, 거기에 그 변전의 절실성을 부여하였다. 간결성 위에 미묘하게 비치는 이 시의 품격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게 된 것은 이 평범한 듯이 보이는, 더 나아가 감상적인 인상까지 비치는 묘사 안에 복잡한 기법적 절차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시에는 조병화 시인의 특징적인 기법의 핵심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 절차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현실의 부정성을 의미 가능성으로 바꾸기. 이는 여집합(餘集合)’을 만드는 절차와 동일하다.

둘째, 의미 가능성을 의미무의미로 분할하고, 무의미로부터 의미로 건너가기 위한 간격을 설치하기.

셋째. 현실에 주체를 투입하기. 두 번째 절차까지 바라보던 주체는 여기까지 진행된 시의 상황이 요청하는 데에 따라, 시의 현실에 참여한다.

 

이 절차들은 또한 가외의 효과를 낳고 있다. 앞의 두 절차에서 현실은 주체를 감싸고 있다. 즉 현실을 이끌어 갈 주체들이 현실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 있었다. 반면 현실 바깥의 주체는 순전히 바라보는 자, 즉 관찰자로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절차를 통해서 주객분리가 일어나고 관찰자는 현실 안에 개입할 주체로 변모한다. 그렇다고 현실이 객체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 행동자가 된 과거의 관찰자(화자)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요청자가 된다. 따라서 세 번째 절차를 통해서 일어난 것은 주객통합도 주객분리도 아니라 상호주체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환의 과정(혹은 절실성)이 화자(혹은 독자의)의 깨달음(혹은 느낌)을 통해서 울림을 가지게 된 것은, 관찰자가 관찰에 정밀성을 부여하면서 자신의 관찰에 내용을 계속 보태고 변화시키는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관찰자는 단순히 수동적 관조자가 아니라, 관찰의 결과를 행동의 바탕으로 만드는 실험자인 것이다.

그러니, 관찰과 행동의 주고 받음의 관계가 처음부터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언뜻 보면 기이한 시구가 태어난다.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感傷감상의 속성은 버一己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후조, 부분[11])

 

철새에게 날개가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눈알을 사랑한단 말인가? 그것은 공간 이동이 천직인 철새는 끊임없이 공간의 구도 전체를 가늠하고 저울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 조병화에게는 애초부터 관찰(세계인식)과 행동(세계작용)이 변별된 채로 부단히 상호작용하였기 때문에 인식의 매순간 세계에 대해 물건을 만들어 내놓는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그의 다작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방금 말한 조병화 시의 기본적 세 절차가 다른 시들에서도 수다히 나타나는 것을 충분히 확인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에 쫒겨서 더 이상의 예증은 삼가고자 한다. 예증 자체가 조병화 시 세계의 유위변전의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또한 매우 긴 지면을 필요로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주)______________

1) 조병화 시전집(국학자료원, 2013) 6권의 목차에 근거하면서, 두 가지 계산이 추가되었다. 첫째, 연작 시집 안의 각 단장들을 한 편의 시로 계산하였다. , 전집 제 2권에서, 밤의 이야기단장 48, 낮은 목소리로단장 80, 3권에서 남남의 단장 55, 5권에서, 타향에 핀 작은 들꽃의 단장 58편이 각각 한편의 시들로 고려되었다. 다음, 여기에 전집 미수록 시 58편을 보탰다. 연작시집의 단장들을 각 시 1편으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총 전집 수록 2889 + 미수록 58=2947편이 된다.

2) 괄호 안의 편수는 연작시집을 시 1편으로 계산한 경우다.

3) 고요한 귀향, in 조병화, 시 전집 - 6. 1997~2005, 국학자료원, 2013(이하, 시 전집 6으로 표기), 663.

4) 잠 잃은 밤에, in 조병화, 시 전집 - 5. 1990~1996국학자료원, 2013, 719.

5) 하루만의 위안, in 조병화, 시 전집 - 1. 1947-1959, 국학자료원, 2013(이하, 시 전집 1로 약기), 133

6) 아내의 방, in 시 전집 6, 117.

7) 가숙의 램프, in 조병화, 시 전집 - 2.1961~1969, 국학자료원, 2013, p.873

8)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in 시전집 1, 553.

9) 버리고 싶은 유산, in 시전집 1, 64.

10)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국적 서정시를 태동시킨 김영랑의 시와 박용철의 시론,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 문학과지성사, 2020, 99~116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11) 버리고 싶은 유산, in 시전집 1,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