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한심한 진심 vs 화려한 거짓 -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한심한 진심 vs 화려한 거짓 -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

비평쟁이 괴리 2024. 2. 28. 10:2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두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문학동네, 2023.11)에 묘사된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인데, 사람들에게 가정되는 일반적인 속성이 박탈된 상태로 드러난다. 그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게, 본명 대신 특정한 약어로 불린다는 것이다. 이 약어들은 인물의 삶의 어떤 실제적인 계기와 연결된 소재들 중에서 우발적으로 선택된 호칭들이다. 그들은 ‘후두티’거나 ‘나무’ 혹은 ‘나무반’이다. 그러나 실제 이 우발적으로 선택된 호칭들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인물들은 다들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이름 하에 자신을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칭이 눈에 띄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이런 방식이 이번 독회에서 함께 후보작에 오른 이주혜의 『기억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이해지만 이는 통신망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개인들이 사회적 네트웍에 긴밀히 참여하게 된 정황에 대한 개인 반응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사회적 네트웍 안에서 일단 ID로 전환된다. ID는 그런데 ‘접속’을 위한 순수한 기능어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실존이 담보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기 위한 다른 지시체를 찾게 된다. ID에 아바타를 입힌다든가, 아니면 ‘별명’을 선택한다든가 한다. 그래서 ‘실명’ → ‘ID’ → ‘별명’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 이행 과정 속에서 개인들은 본래의 실명이 내포하고 있던 자신의 속성을 버리고 새로운 내용으로 자신 안을 채운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인 사회적 삶 속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정체에 대한 불만이 ‘별명’을 통해서 새로운 지위와 정체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이주혜의 『기억은...』을 비롯해 상당수의 요즘 소설들에서 작동하는 절차이다.
그런데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는 그런 경향에 대해 역방향을 취한다. 여기에서의 편의적인 별명들이 인물들의 삶의 진실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실은 인물들이 자신에게 붙은 별명을 통해 심각히 왜곡당하고 있는 양상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사회적 별명들은 그들의 실존이 아니라 또다른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조작된 속성들의 창고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요약적으로 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정보가 덧붙으면서 사고는 안타까운 비극이 됐다.”(p.90)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SNS상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 와중에 그에게 닥친 우연한 사고는 여러 가지 곡절을 내포한 안타까운 사연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 그의 죽음의 진상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먹이로 활용될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때로 무시무시한 사회적 폭력이 되기도 한다. 최근 축구선수들에 대한 사회적 네트워크 장소에 팬 및 안티팬들이 몰려가서 쏟아붓는 엄청난 말 폭탄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독자는 21세기의 새로운 언어 현상의 기본 형식이 단순하지만 그러나 아주 날카롭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21세기에 들어 언어 현상에서의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전 세기에서 언어가 대체로 사건에 대한 성찰과 해석과 반성의 장치로서 개입한 데 비해, 21세기의 언어는 사건에 사로잡혀서 사건의 환상성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하는 병렬기구로서 쓰이는 경향이 유독 강해졌다는 점이다. 사건은 언어를 타고 더욱 화려하게 거짓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이것을 두고 필자는 ‘의미주의의 부패’라고 부른 적이 있다. 요컨대 이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온갖 이야기들을 쏟고 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존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갈증이 그들을 그렇게 내모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갈증에 대한 탐닉 속에서 그들은 점점 자신의 진실이 아니라 거짓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온몸‧마음이 망가지고 있는 참이다. 그것이 ‘부패’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제 모습이다. 
이런 SNS 안에서 별명은 이런 언어+사건의 환상적 스펙타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여기에 실존이 붙는다고 생각하는 게 오늘날 사회적 네트워크 참여자들의 일반적인 기대라면, 실제로는 이 별명에는 여러 사람들이 향유할(그리고 주체 자신도 같이 누린다고 착각하는) 모종의 미래의 열락을 위한 소재들이 들어차는 공간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인물들은 장미빛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는 착각 속에 이미 정해진 위치에 할당된다. 그들은 “적절히 준비된 모습으로 정해진 장소에”(p.9) 못박힌다.
안보윤의 소설들의 압도적인 정황을 구성하는 게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 정황 속에서 인물들은 그 안에 ‘특이한 방식으로’ 휩싸여 들어간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또다른 특성이다. 이 인물들은 사회적 네트워크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가 처참한 경우가 이 인물들의 사정이다. 따라서 이 인물들은 보통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긴 하지만, 그 안에서 모종의 결여를 가지고 문제를 인식하거나 혹은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그 문제로 인해 그들은 별명을 갖지 못하고 기어이 본명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본래의 실존이 있다고 믿고 그런 것을 보증해주는 소재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의 현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중하류층의 미래가 막힌 그런 꼴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한심한 진심’과 ‘화려한 거짓’ 사이의 대립이 이 소설집의 표면을 장식한다. 그러나 독자가 읽어야 할 것은 이 표면의 단순한 대립 안에서 작동한 언어+사건(이미지)의 결탁 혹은 의미주의의 부패 현상이다. 안보윤의 소설집에서 그런 각성을 유도하는 인물든은 방금 말한 문제를 일으키거나 문제를 인식하는 보통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적 주인공problematic her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