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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환상문학의 특별한 전개 - 최진영의 『단 한 사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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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환상문학의 특별한 전개 - 최진영의 『단 한 사람』

비평쟁이 괴리 2024. 3. 27. 08:0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세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최진영의 『단 사람』(한겨레출판, 2023.10) 오늘의 한국 소설, 아니 한국문화의 특정한 예각을 살피게 한다. 예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런 유형의 문화를 자발적으로 즐기는 인구가 상당수를 이루고 나아가 증가하고 있다는 짐작이 작품을 주목하게 까닭이다.

가지 점을 말해보자.

하나는 판타지(가상 현실) 현실 상황에 도입하는 방식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자면 판타지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없는 소망적 상황을 현실로 간주하고 참여시키는 장르이다. 비현실성의 현실성 작동하는 방식은 다양할 있다. 순진한 판타지들은 비현실성 자체에 몰입하는 양상에 빠진다. 이를 통해 순진한 독자는 판타지 속에서 열락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작품에서 빠져 나왔을 때는 다시 지긋지긋한 실제 현실로 돌아와 있다. 판타지는 마약이 된다.

그래서 환상문학 다룬 많은 식자들은 판타지가 모종의 방식으로 실제 현실을 환기시킬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해 왔다. 판타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작인 츠베탕 토도로프의 『환상문학입문[1]』이 줄기차게 환기시킨 점이거니와, 한국의 계열의 정신의학자 이나미 역시, 『융, 호랑이 한국인과 놀다』에서 본능적인 야생의 힘만을 가진 판타지(무당 호랑이) 창조력을 소진시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2].

오늘의 작품, 『단 사람』은 판타지의 비현실성을 현실에 잇기 위해 이중적 절차를 개입시킨다. 하나는 작품의 서두에 요약본처럼 제시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일종의 우화로서 판타지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시도는 과거의 소설에도 자주 나타났던 것인데, 가령 장용학의 중편 『요한시집』의 앞머리에 제시된 동굴을 기어나오는 토끼 우화가 전형적인 사례라 것이다. 이때 우화는 비현실성을 간직한 채로 현실에 대한 일종의 압축적 비유로서 기능한다.

최진영의 작품은 한데 여기서 걸음 나아간다. 우화를 본문의 사건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타지와 현실이 뒤섞여 버린다. 현실 속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양상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없는 행동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작가는 초현실적인 양상들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특정한 인물군을 등장시켜 어긋남을 묽게 한다. 대물림으로 신내림 받은 가족이 그들이다.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 삼대에 걸친 여인들은 없는 방식으로 신적 존재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들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무당의 영험은 미신에 불과하다. 정신분석학자 임진수는 무당의 자기 환상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대입한 바가 있다[3]. 그런데 한국인들의 일반적 심성 속에서 샤머니즘은 매우 일반화된 정서를, 아니 정념을 형성하고 있다. 정념 속에서 무당의 영험은 숨겨진 사실 혹은 미래의 사실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어서 정념이 품은 흡인력이 과학을 압도한다.

순간 역전이 일어난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고 실제 현실은 외양이 된다. 그리하여 애초에 우화의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현실 안으로 안착한 판타지가 현실을 삼켜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만일 이런 방식의 문화적 향유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효과와 더불어 원인을 물어야 한다.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하겠지만, 효과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트러버리는 데서 오는 심리적 만족으로 보인다. 경계의 붕괴와 더불어 환상을 즐기면서도 실제 현실에서의 환멸이라는 현실의 보복을 피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참여자들은 현실로 간주된 환상 스스로 주도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만족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효과 자체가 원인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환상-현실의 장막 안으로 숨었을 뿐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어쩌면 불만이 옛날의 현실/환상의 분리에서처럼 좌절과 열패감으로 귀결하지 않고, 분노와 투쟁에 대한 의욕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창출된 시너지 효과가 21세기 신인류가 발견한 생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한 분노이고 투쟁이 있을까? 환상은 어떻게 과학에 연결될 있고, 생의 변혁은 여하히 인류와 생명과 우주의 공진화에 동참할 있을까? 우리가 결국 물어보고야 질문이다.

하나의 특징을 생각해보자. 판타지의 핵심이 되고 있는 신내림 혹은 무당으로서의 현상되는 방식이다. 이는 인물들의 사회적 기능, 무당의 기능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무당의 기능에 대해서는 숱한 소설들이 씌어진 바가 있다.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2011) 해원(解冤) 방향에서 기능을 탐색한 깊은 소설이다. 소설의 깊이는 개인적 해원 집단 해원 보편 해원이라는 가지 성층을 순환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한국 지식장의 현재적 수준이 집단 해원 수준에서 치열하게 드잡이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진지한 독자들은 읽어 보아야 소설이다.

최진영의 『단 사람』에도 기능에 대한 질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사람만 구할 있는가?라는 의문은 보편적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가 대한 갈망을 지향하는 여린 싹이라고 있다. 실제로 대단원 언저리에서는 무당의 존재이유가 궁극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립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볼 때마다,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위험한 현장에 스페어타이어처럼  사람을 몰아넣는 사람을 볼 때마다, 사회적 참사로 죽은 사람들을 비웃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을 볼 때마다……(p.228) 

 

 

그러나 실제로 작품의 전개는 대목이 기대케 하는 방향과는 멀리 벗어난다. 이유의 실마리는, 작품이 판타지에 기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기이한 사건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연속적으로 제출되기 때문에 인물들의 각각의 문제가 정향을 찾기가 힘들고 때마다의 구인(救人) 사건으로 나타나기만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초점은 무당들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좁혀진다. 요컨대 소설은 무당의 기능을 탐색하는 소설이 아니라 무당의 존재이유를 묻는 소설이다.

이러한 기본 정향 때문에 인물의 신내림 대한 입장의 변별성이 도드라진다. 임천자에게 기적이었다면, 장미수에게는 고통으로 겪어진다. 임천자에게 사람 구하는 일이 사람 자신에게 신이 내린 기적이라면, 겨우 사람만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는 장미수에게는 고통이다. 반면 신목화에게는 이것이 모종의 목적 가진 것이라고 가정되고 탐구된다. 신목화는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건 삶과 죽음을 분별할 필요가 없다 . 따라서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라는 것이다.

 목화는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했으며 그와 같은 죽음을 원했다. 그러므로 남김없이 슬퍼할 것이다. 마음껏 그리워할 것이다. 사소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목화가 원하는 . 둘이 었다가 하나가 나무처럼 삶과 죽음 또한 나눌 없었다.(pp.238~239)

 

마지막 대목이다. 그런데 임천자 → 장미수 → 신목화로 이어지는 입장의 변화가 치열한 긴장을 통한 상호 대결의 과정 속에서 생각의 진화를 이루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들이 마주하고 해결하기도 하는 사건들은 연결되고 길항하고 추동되기보다는 에피소드들의 ‘사진첩 넘김’과 같은 방식을 통해 변전한다. 따라서 방금 읽은 마지막 대목이 처음 입장들의 분별이 시작된 대목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좀 더 꼼꼼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천자에게 두려움이, 미수에게 사랑이 있었다면 목화에게는 질문이 있다.(p.96)



[1] Tzvetan Todorov, Introduction à la littérature fantastique (coll.: Points), Paris: Seuil, 1970

[2] 이나미,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 우리 이야기로 보는 분석심리학』, 민음인, 2011, p.154.

[3] 임진수, 『세미나 IV. 환상의 정신분석』(2004) 중 「XII. 기족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