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0:45

순수 개인의 세계를 처음 그리다

  서울 1964년 겨울이 오늘날에도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1960년대에 등장했을 때, 김승옥의 소설들은 모두가 화려했다. 그것들은 통째로 젊었고 한편 한편이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작품들은 연륜 속에서 썩 점잖아진 듯이 보인다. 이제 젊은 독자들이건 나이 든 독자들이건, 그의 소설들을 생생한 감각으로 읽기보다는 역사 속에 새겨진 한국인의 옛 경험으로, 혹은 지긋한 나이가 되어 되돌아보는 젊은 날의 초상으로 읽는다. 그 독서에도 당연히 생생함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 강렬함은 의식적이다. 어떤 거리를 독자의 뇌와 심장 속에서 더듬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미련처럼, 안식처럼, 동경처럼 차오르는 느낌이다.

그러나 서울 1964년 겨울은 지금 이곳에서 젊다. 그때도 젊었고, 지금도 젊다. 청년들에게 읽히면 금세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이 소설이 김승옥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한국현대문학의 뿌리를 이룸과 더불어, 그 뿌리로부터 어느 지점에선가 훌쩍 이탈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문학의 뿌리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인가? 최인훈, 이청준과 더불어 김승옥의 작품들이 해방 이후 공화국에서의 한국인의 주체적 형상을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주체적 형상은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개인이다. 물론 그 이전의 소설에서도 개인은 있었다. 그러나 그 개인들은 대체로 식민지 조선의 민족의 분신들, 아바타들이었다. 식민지의 조선인들에게는 개인이 되려면 우선 민족해방을 달성해야 한다는 선결 과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든, 한국인은 공화국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게다가 그 공화국은 젊은 청년들이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었다. 최인훈이 감격에 차 노래했던 바로 그 공화국이었다. 비로소 민족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개인, 세계를 형성하는 자로서의 개인이 소설 속의 주 인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살아 있는 개인을 위해, 김승옥은 자기세계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다.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진 자, 즉 제 몸과 마음 안에 세상에 대한 인식과 동경과 제 삶에 대한 기획과 행동 강령을 품고 있는 자만이 세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는 자기세계와 그 자기세계를 가진 자들이 이룰 전체세계는 동등한 비중으로 연관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기 세계는 전체세계에 의해 압도당했다. 왜냐하면, 자기 세계가 하늘의 맨살을 반짝 드러낸 이후, 곧바로 독재의 구름에 뒤덮여서 다시 닫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기세계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제 3공화국의 대의에 봉사하는 데서 자기를 키우거나, 아니면, 그에 대항하여, ‘민주화라는 시민사회의 대의에 긴박되거나 해야 할 운명에 놓인다.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요구에 일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세계의 종속성이 새롭게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러한 사회의 요구와 갈등을 일으킨 자기세계의 특정 부면들은 모두 음침한 동굴의 형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명연습, 무진기행, 환상수첩에서 묘사된 끈적거리고 음모 가득한 그 괴상한 자기세계들은 그래서 태어났던 것이다.

한국인의 자기세계가 그러한 사회의 요구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1987년 유월항쟁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이다. 이 즈음에 세 가지 세계적 사건의 동시적 폭발이 있었고(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으랴), 그 폭발에 의해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었는데, 한국인들은 이 변화한 신세계에 가장 잘 적응한 존재들이 되었다. 한국인은 그때부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사는 은근과 끈기를 내장한 의 민족이기를 그치고, “다이나믹 코리언으로 일대 변신하였던 것이다. 비로소 한국의 각 개인들은 그 스스로 역동적인 존재들, 즉 사회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가꾸는 데 전념하는 존재들로서 자아를 즉,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순수개인이 그렇게 한국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서울 1964년 겨울은 바로 어떤 사회적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려는 그런 순수 개인들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이 사람들을 보라. 이들은, “영보 빌딩 안에 있는 변소 문의 손잡이 조금 밑에는 약 이 센티미터 가량의 손톱 자국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건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진실, ‘자기만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그 자신만의 세계가 우선하는 것이다. 작가는 동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주체성의 발견과 그것의 사회적 일치 사이에 고민할 때, 그 사회로부터의 고리를 끊어놓고, 주체성의 존재 양식 자체를 탐험하는 희귀한 실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작가는, 사회적 요구가 희미해지고 자기에 대한 욕망이 팽대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생생한 체험의 장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찬양하고, 이 순수 개인들의 장소를 낙원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하면 그처럼 큰 오해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런 순수-개인은 주체의 자기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미지 바깥에 물론 사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깥에는 기이한 어둠들이 있고, 그 어둠과 개인들은 싸우거나 화해하거나 공존하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울 1964년 겨울이 전하는 최종적인 메시지이다.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쉽게 읽고 버리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쓴 날: 2011.2.16.; 발표: 문학나무2011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