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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정진규의 「교감(交感)」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50

交感

몇 해 전 요즈음 나는 잘 먹힌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행복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한 엄마를 보면서 고함치도록 행복하였다 그는 정말 잘 먹히고 있었다 아이가 배가 고플 때쯤이면 젖이 찌르르 신호를 보낸다고 했다 이건 분명 먹이다가 아니라 먹히다이다 먹히다는 고함치도록 행복하다이다 그러니 모유가 제일이다! 그대 오늘 사랑이 고픈가 이 몸이 지금 찌르르르 신호를 보낸다

(정진규 시집, 도둑이 다녀가셨다, 세계사, 2000)

 

인생은 고달프다. 그래도 잘 나간다고 시인은 뻥친다.’ 그걸 잘 먹힌다고표현하고 다녔다. 뻥칠 때의 의미는 세상일이 내게 잘 들어맞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속뜻은 내가 되는 일 하나 없이 남에게 먹히기만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자조이자 세상에 대한 은근한 힐난이다. 그런데 오늘나는 젖을 물리고 있는 한 엄마를 보았다. 그것 또한 먹히는 광경이었지만 고함치도록 행복한먹힘이었던 것이다. 그 광경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처음엔 사는 게 한심하니 말하는 것도 지겹다는 듯 두 번 연달아 쉼표를 찍더니 그 다음엔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한달음으로 말을 쏟는다. 마치 시인의 입이 말에 먹히고 있는 것 같다. 고함치도록 행복하게! 중간에 느낌표는 그래서 나왔으리라. 고달픈 인생은 고픈 인생에게 마구 먹힐 때 행복해진다. 그런 행복은 피붙이 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광경이 타이들과의 다른 관계를 꿈꾸게 한다. 동족 간의 사랑이 이성 간의 사랑을 촉발한다. 그렇게 촉발된 다른 삶을 증폭시키는 것은 물론 시인의 언어이다. ‘먹힘이라는 단어를 네 번 포개서 사중주의 음악을 만들어낸 그 말솜씨이다.(쓴날:2002.03.06, 발표:주간조선1696, 200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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