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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집 읽기

이기성의 동물의 자서전

비평쟁이 괴리 2020. 11. 9. 07:23

이기성의 동물의 자서전(문학과지성사, 2020.09)은 사라진 세계를 슬퍼하는 시들도 채워져 있다. ‘사라진 세계라고 한 것은, 화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 장소혹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명백하게 있는데, 그러나 사라진 장소이다. 그런 장소의 형상성을 시인은 첫 시부터 눈 덮인 세상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이게 뭘까. 입속에 수북한 눈송이. 하얀 눈 흩어진 벌판에 나는 갇히리. […] 너의 망각 속에서 나는 하얗게 얼어붙으리, 생각하면 이게 뭘까, 내 입 속에 수북한 눈송이. (「망각」)

 

이 시구에 의하면 사라진 세계는 나의 망각으로 인한 것인데, 그 망각의 결과 눈 송이가 내 입 속에그득 쌓임으로써 는 너를 노래할 수가 없다. 노래할 수가 없다라는 사정을 입 속에 눈이 가득 쌓였다라는 진술로 치환하고 있는데, 이를 감각적으로 느끼려면, ‘으로 바꿔 읽으면 된다. 눈 앞의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서 나는 세상을 찾아볼 수도, 찾아갈 수도 없다는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그렇게 의미를 뽑아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으로 바꾸었는지를 마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치환의 까닭은 은 순수한 객관의 기능을 하는 데 비해, ‘은 간주관적 기능, 즉 대상에 대해 무언가 작용을 하거나, 꾀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화자는 그 대상의 상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자신이 할 일을 모색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여기서 명백히 시인의 대리인이다. 즉 화자는 노래하는 자인 것이다.

여하튼 그러나 그 책임 때문에 사라짐의 무게는 더 강하게 주체를 옥죈다.

 

너의 망각 속에서 나는 하얗게 얼어붙으리,

 

와 같은 진술은 그래서 나온다. “너의는 주격이 아니라 대격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내가 너를 망각한 것이지, ‘가 나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진술 자체는 를 주격으로 읽게끔 추동하는 기운이 있다. 그것이 나의 수동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 인식을 가 스스로 행한 잘못을 추궁하는 반성으로 나아가게 한다.

화자가 잃어버린 세계가 찾아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명백히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은 눈 덮인 바깥 세상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히 감득할 수 있다. 그것은 이런 문법적이거나 의미론적 불균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니 손바닥 가득 죽을, 죽을, 노인이 소리쳤어요. 간절한 죽처럼, 검은 죽처럼, 죽과 같이 나는 사라지리, 나는 점점 흐려지리, 늙어버린 영혼이 깊은 곳을 텅텅 울리면서 수탉처럼 소리쳤습니다. (「죽을」)

 

에서 늙어버린 영혼이 깊은 곳을 텅텅 울리면서는 무심코 읽으면 늙어버린 영혼의 깊은 곳을 텅텅 울리면서라고 읽게 된다. 그러나 가 아니라 . 늙어버린 영혼깊은 곳은 분리되어 있다. 그 분리를 통해 깊은 곳의 주어는 부재한 상태임이 노출된다. 그런데도 깊은 곳은 깊은 곳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세계의 사라짐과 사라진 세계의 현존성을 뚜렷이 환기한다. 이런 표현은 의미론적인 불균형을 통해서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시끄러운 동물들은 겨울을 좋아하고 꼭꼭 문을 닫고 두꺼운 담요를 뒤집어쓴 채 열중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은 공중에

 

어떤 문장은 얼음 바다보다 깊습니다. 그건 자정보다 어둡고 밤의 허벅지를 찌르는 파란 뿔을 가지고 있고

 

어느 날에 꽃을 피웁니다. 그것은 30년 후에 혹은 백년 후에 돌아올 폭풍과 같으며 눈물처럼 범람하는 것 (「동물의 자서전」)

 

인용문의 세 번째 연의 첫 번째 문장, “어느 날에 꽃을 피웁니다의 주어는 두 번째 연의 첫 두 단어, 어떤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가 어색하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두 번째 연의 동사들이 상태동사인데 비해, 세 번째 연에서 그것이 문득 동작 동사로 변한 데서 온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어떤 문장을 쓰는 주체는 첫 번째 연의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손가락과 어떤 문장사이에 단절이 있다. 통상적인 문장이라면,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은 공중에 [문장들을 씁니다.]

어떤 문장은....

 

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에서 [ ]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그 누락은 손가락문장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두 번째 연의 상태동사는 자연스럽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연에서의 동작동사로의 돌변은 놀람을 유발한다. 도대체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이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놀람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세 번째 연, 다음 문장의 “30년 후에 혹은 백년 후에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느 날에 꽃을 피웁니다어느 날에 꽃을 피울 것입니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궁글리지 않으면 어느 날에 꽃을 피웁니다는 주어가 감추어져 있다는 의혹 쪽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장소의 상실과 장소의 명백한 엄존성. 그것이 이기성 시의 상황이라면, 공간의 망실과는 달리 시간은 살아 있다. 그리고 공간을 잃어버린 존재들은 늙어버린 영혼이고 죽은 노인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여전히 생존을 모색한다. “영혼의 어디서 깨진 종이 울릴 것 같”(죽을)아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앞에 인용했던 시구를 다시 끌어와서 그 생존 운동의 모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 손바닥 가득 죽을, 죽을, 노인이 소리쳤어요. 간절한 죽처럼, 검은 죽처럼, 죽과 같이 나는 사라지리, 나는 점점 흐려지리, 늙어버린 영혼이 깊은 곳을 텅텅 울리면서 수탉처럼 소리쳤습니다. (「죽을」)

 

죽을노인이 죽어가는 모습으로 죽을 달라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알 수 없는 깊은 곳을 텅텅 울리면서 수탉처럼소리치면서 그렇게 살아있다.

그러니까 공간의 망실에는 대가가 있다. 세계의 사라짐을 장소에 국한시킨 대가로, 여전히 그 세계를 되찾으려는 운동(시간)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망실된 세계의 엄존성에도 대가가 있다. 시간은 남아 있고 공간은 가정적으로 현존한다. 거기에서 화자(주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 가정된 공간을 바탕으로 탕탕 튀는 것. 이기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발로 훌쩍훌쩍 뛰어오르는 연습이다. 이 시편들이 모두 기묘한 판타지를 감추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창고 속 늙은 혁명의 이마 위에서 틱틱톡톡 명랑한 벼룩의 춤을 춘다면 백 년 동안 쌓인 먼지처럼 두꺼운 겨울이 오지 않을 춤을 함께 출 수 있다면 (「도서관」)

 

이 시집은 사라진 세계의 백년동화이다. 그 백년 동화가 그려내는 것은, 나의 잘못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고자 하는 현재 진행중인 자서전이다.

 

동물의 얼굴에 눈이 쌓이고 밤새도록 새하얀 동물의 자서전이 씌어집니다” (「동물의 자서전」

 

 

송승환의 해설, 회색 사유자의 노래는 성실한 글이다. 몇 개의 선입관이 앞서고 논리적 비약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꼼꼼히 시구들을 읽으면서 그 감각적 효과를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더 나아가 이 시집의 잃어버린 세계가 1970년의 세계, 전태일의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라는 발언이 온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지켜져야 한다는 깨달음이 처음 태어난 세계라는 발견을 해낸 것은 그의 성실 독해의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