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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1:11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대한 유쾌한 도전

아이작 아시모프, 아이, 로봇, 김옥수 옮김, 우리교육, 2008, 380, 9800

 

아이작 아시모프가 기왕에 쓴 로봇에 관한 단편들을 묶어 1950년에 일종의 연작소설집으로 발표한 아이, 로봇은 아마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쾌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로봇과 대면하게 되는데, 특히나 인간으로서의 인물들과 주인공의 자리를 다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주 강력한 경쟁자인 타자로서 그를 접하게 된다. 경쟁적 타자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바로 디지털 문명에서의 생명의 존재방식과 직결된다.

그 존재방식이 어떤 윤리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체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각성은 근대 사회의 인간의 가장 큰 덕목에 대한 중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그 덕목이란 인간의 자유의지와 독립성을 말한다. 그것은 가령 섬에 홀로 버려진 극한상황에서도 제 의지와 힘으로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로빈슨 크루소에게서 가장 집약적으로 구현된 인간적 덕목으로서, 신이 숨은 시대에 세계의 기획·관리자로 전면에 등장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 높이 상찬되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네트워크 상의 한 그물코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아를 형성하는 속성들도 일관된 공통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여러 타자들 사이에 분배된 것으로 이해되고, 자아는 그러한 속성들이 부단히 흘러들고 나가는 하나의 통로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충만한 인간의 이미지, 신의 완벽성을 본뜬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후기-근대 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는 앞에서 그려본 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시방 인간의 자기에 대한 욕망이 폭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욕망을 통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강력히 주장하고 개성을 구가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맘껏 향유하면서 살려고 한다. 그렇게 된 배경은 두 가지다. 하나, 디지털 문명은 바로 전 시대 인간들의 개인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하는 방향 속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퍼스널 컴퓨터에서 스마트 폰에 이르는 모든 문명의 기기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 디지털 문명이 실제로 진행시키고 있는 해체적 양상들은 인간들에게 존재의 불안으로 야기하여, 인간들을 더욱 자신의 개체성에 집착케 하는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존재들의 관계가 세계 운행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는데, 인간은 실체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공존이 중요해진 세상에서 인간은 여전히 유아독존의 태도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태도가 인간의 세계 지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이 현상은 좀처럼 바뀔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공존의 방식과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위한 자세에 대해 거의 훈련을 쌓은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 아이, 로봇에서 세계 조정자의 위치에까지 오른 로봇-인물이 말하듯이, “인간 사회는 각각의 발전 단계마다 독특한 갈등을 겪었고, 그 모든 갈등을 결국 힘으로 해결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pp.331~32)으니, ‘새로운 문제새로운 전쟁사이의 끝없는 악순환만을 낳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러니까 공존과 관계를 위한 훈련을 쌓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훈련을 위해서 로봇은 가장 맞춤한 조교임을 이 소설은 강력하게 암시한다.

로봇이 처음 등장한 건,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쓴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조현진 역, 리젬, 2010)에서이다. 거기에서 로봇은, 그 어원이 가리키듯 힘든 일에 시달리는 잡역부로 묘사된다. 그 로봇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간과의 갈등을 야기하자, 그 갈등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말살을 야기한다.

아시모프는, 차페크가 가정한 갈등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그 유명한 로봇 공학 3원칙을 제정한다. 그 원칙에 의해서 로봇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이 인간의 의도와 명령을 어기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세 원칙의 내적 모순에 의해서 로봇의 판단이 모호성의 늪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로봇이 논리적인 사유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3원칙 자체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여 의사결정과정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게끔 점차로 자기 존재를 진화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실상, 바로 이 자리는 아시모프가 인간과 로봇의 공존을 위해 교묘하게 파놓은 논리의 함정과도 같은 자리이다. 왜냐하면, 로봇은 주도권을 쥔 순간에도 로봇 공학의 원칙 때문에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정을 끌고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로봇의 진화는 인간과의 끝없는 협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상황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인간은 자신을 배태한 자연과의 끝없는 협상을 통해서만 자신의 진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러니까 모순의 한 가운데가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인간과 로봇 사이의 우발적 사고로 점철되어 있는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모두 그러한 신기한 탈출의 모험으로 박진하다. 그 스릴 속에서 독자들은 공존의 의미를 매번 새롭게 저작할 수 있을 것이다.(쓴 날: 2011.4.26.; 발표: &, 20115월호, ‘청소년을 위한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