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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의 『어른스런 입맞춤』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정한아의 『어른스런 입맞춤』

비평쟁이 괴리 2011. 9. 11. 00:34

정한아의 시들 밑바닥에 슬픔의 감정이 가득 고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장문의 시인의 말에는 우산대신 Enough to say it’s far라는 제목의 시집을 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집은 박재삼의 영역시집, 아득하면 되리라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독자는 정한아가 박재삼과 정서적 친연성이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 그의 시를 들춘 순간 근원을 알기 어려운 슬픔을 얼핏 엿본 느낌을 되짚게 된다.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인근원을 알 수 없다는 말이고, 담화적 근원, 즉 독자와 함께 이루는 사회적 세계에서 슬픔이 미만하게 된 원인은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상황은 붕괴되었는데 인간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태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이 상황 인식은 저 옛날 길재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시구를 떠오르게 하는데, 실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길재의 상황과 정반대이어서, 길재가 나라의 멸망을 아쉬워한다면, 정한아의 시는 현대 문명 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존재의 무의미, 아니, 차라리 희비극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길재의 시에선 무상함과 섭섭함이 동시에 떠오른다면, 정한아에게서는 엉뚱함, 부당함, 황망함, 막막함 등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래서 가령,

 

지금 에덴에는 뱀과 하느님뿐
그 외 나머지인 우리는 

입을 맞추고 눈꺼풀을 핥고 우주선처럼 도킹하고 어깨를 깨물고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입에서 모래와 독충을 쏟고 서로의 심장을 꺼내어
소매 끝에 대롱대롱 달고

재투성이 심장으로 탁구라도 치면서 위대한 죄나 지을 수밖에
뱀마저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과 연애한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 천사였을 거야)

 

같은 시에서, 독자가 읽는 것은 이곳은 에덴이 아니다라는 시대와 상황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우리는 낙원 아닌 곳에서 형편없이(좀 더 자극적으로 말하면, 지랄맞게) 살고 있다는 자조, 자기모멸의 감정이다. 전자의 인식이었다면, 마지막 행에서 에덴마저 붕괴되고 있는 사태는 목격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바닥도 천당도 없다는 상황 인식, 또한 왜 나는 돌이 아닐까 썩어서 따뜻한 거름이 안 될까 왜 여전히 눈은 부시고 입술은 미풍에 벌어져 너의 손톱도 쓱싹쓱싹 자라는지 알고 싶을까”(타인의 침대)라는 자기 인식에 의해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세상 사람들은 한편으로 자기의 유한을 깨달은 하룻강아지들의 / 폭우 속 기우제 만세! / 쨍쨍한 목숨들은 갈증으로 몸부림치”(눈을 가리운 노래)는 존재들, 즉 무너진 상황을 환각적으로 재현하는 존재라는 하나의 극과

 

네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네가 소환한 너의 웬수 같은 하느님은 황폐한 발바닥으로 너의 등짝을 밟고 서서,
(양심, 이다지도 더러운 고통이라니!
이토록 탐욕스런 발바닥이라니!)

 

라고 한탄하는 존재, 즉 상황의 붕괴를 따지려고 신을 불렀다가 죄를 고스란히 떠맡는 자라는 또 하나의 극 사이를 왕복한다.

정한아 시의 개성이 특별히 드러나는 부분은, 저 멀쩡한 인간들이 아무리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멀쩡하다는 그 사실에 의해서 실존의 부피와 무게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화자를 포함해 시의 인물들은 두루 작지만 감각적인 물질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깨달음을 가진 존재라는 걸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유한은 아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상황 속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을 다룰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래서 상황은 그들을 압도하기보다는, 홍수졌으나 그들의 발목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물과도 같다.

 

유유히
길이 보인다는 듯
무섭도록 깔깔한 수다를 흘리며
사람들은 제 발에 꺽꺽 차이는
단단한 울음을,
차일수록 자욱해지는
지랄 같은 외로움을,
몰고 간다. (이상한 가투(街鬪))

 

게다가 이 인물들에게는 시인 자신으로부터 오는 게 틀림없는 지성이 있다. 그 인물들에게서 절망과 여유가 동시에 있고, 그래서 그들이 그 사이에서 얇은 흔들림을 생의 신호처럼 느끼고 사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더러운 새벽, 순결한 것은 오직 내일의 폐허 위 간신히 몰래 내리는 피, 피곤한 빗소리 얇은 흔들림. (타인의 침대)

 

그의 인물이 마침내 크루소로 수렴된 건 불가피한 일이다. 동시에 그 크루소씨가 디포Defoe로빈슨 크루소처럼 자유의지로 충만하지 않고, “간신히 노련”(이상한 가투)하게 사는 키작은 크루소씨인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전자의 불가피함은 정한아가 자신의 시의 운명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가리키고, 후자의 불가피함은 시인의 정직성을 가리킨다.

 

 

부기: 그의 시집에는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두 편의 시가 있는데, 애인상사가 그것들이다. 둘 다 사랑과 관련된 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의 시를 더 좋아한다. 애인이 세상에 절망한 이가 상황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을 때 막바지에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상사는 자신(화자)의 불모화를 상대방의 흥분으로 치환함으로써 두 남녀를 동일화하면서 동시에 상황을 반전시킬 틈을 여는 기묘한 재주를 연출하고 있다.(2011.09.11.)

 

부기 2: 시인이 등단할 때 썼던 추천사를 다시 읽어 보니, 당시의 독해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삼아, 그 추천사를 옮겨 본다.

 

정한아의 시는 동년배의 젊은 시인들과 기본적인 시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삶의 무의미함, 무의미의 경계를 뚫고자 하는 충동적 에너지, 그러나 좌절의 예감 속에서 바스라지기만 하는 삶의 의욕, 화석과 죽음 이미지의 다양한 변이형들, 권태를 견디는 유희의 매너리즘... 그러나 그의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그런 양식화된 정서가 아니라, 그 정서의 섬세한 배치이다. 그 배치의 섬세함은 너무나 은근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눈 밝은 사람이 스스로 체험코자 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그 미묘한 맛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그런 섬세함이다. 가령, 애인에서의 책상-애인의 은유는 책-애인 혹은 의자-애인 등의 흔한 비유 체계를 살짝 변용한 것인데, 시의 깊은 맛은 그 변용에 있지 않고, 무심코 지나가는 말투로 서술된 책상의 나직한 고동소리와 맨 마지막 행에서 시의 앞으로 도드라지게 기술된 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사이의 미묘한 대비에 있다. 혹은 묘지는 지구의 서랍에서 묘지-서랍 역시 지구-묘지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슬그머니 비틀은 것인데, 이 비틀음 자체는 재기 이상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맨 마지막 행의 보이지? , 감아도?”에서의 물음표와 쉼표의 절묘한 사용은, 이 한 행 뿐 아니라 시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를 형성시키는 데 기여한다. 또한, 집에 돌아와 10년 째 두문불출인 크루소씨의 앵무새에서 기술된 발언들은 이것이 제목에서 지시된 앵무새의 말임을 유념하고 읽을 때 그 감각적 느낌이 멋지게 살아난다. 한데, 이러한 정서의 섬세한 배치는, 그가 양식화진 시적 감정을 실질적으로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삶의 무의미와 부정의 충동과 의욕의 마모 속에 그냥 빠져 있는 게 아니라, 버려지고 바스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속에서 그것들과 함께 살아내고자 하는 감정을 스스로 북돋고 키우는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습의 결과가 저 정서의 섬세한 배치인 것이다. 등단을 축하하며 정진을 권한다. (20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