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정주 시집 『홍등』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이정주 시집 『홍등』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32

이정주의 시집 홍등(황금알)을 읽는다. 아주 오래 전에 그의 시를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홍등을 읽으면서 개성적인 시인 한 사람이 어둠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걸 알겠다. 그렇게 되는 사정에는 나를 포함해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건 두말할 게 없다. 한국 비평의 특징적 욕망인 아젠다 주의(아젠다 주의는 말을 험하게 하면 건수 주의)도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리라. 아젠다 주의는 깃발을 올릴 것만을 골라내는 매우 인색한 여과기를 장치하고 있다.

여하튼 홍등의 개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시는 실크로드. 거기에는 미싱을 타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가 짜는 옷감으로부터 실크로드가 태어나 한 자락 사막으로 펼쳐지고 미싱 바늘로부터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경의 말씀이 피어 올라 달처럼 떠오른다. 그 달빛 아래, 미싱타는 여자들의 노동과 낙타의 한없는 걸음이 겹쳐져 노예들의 울음 소리 같은 게 깔리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부자가 아니라 바로 미싱 타는 여자들이라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는 구조들 사이의 탄력이 있다. 현실과 문화와 말씀이 각각 제 운동을 하면서 상대 구조를 민활케 하는. (200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