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비평쟁이 괴리 2021. 2. 27. 18:1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2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이 소설은 초창기 공산주의자 현 앨리스의 비극적인 행적으로부터 출발해 그 아들정 웰링턴과 지인들의 말과 생각과 견문들을 따라가고 있다. ‘현 앨리스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의 훌륭한 추적기,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돌베개, 2015)이 있었으니, 이 소설은 그 기록의 후일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학자의 관심이 인물의 자취를 실증적으로 조사하여, 그 생애를 복원하는 데에 있다면, 소설가는 그 드러난 삶에 대해 다양한 성찰을 꾀한다. 그 성찰의 핵심은 이념이라는 환()에 휘말려 드는 일의 허망함과 불가피성이라는 모순된 얽힘에 대한 괴로운 반추이다.

이 모순과 정면에서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장르에 합당한 구조적 두께를 확보하고 있다. 이 두께를 관통하면서 독자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삶은 단순히 선악으로 재단될 수 없으며, 그 내력을 꼼꼼히 추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의 뜻과 오류를 파악하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진전된 생각과 행동을 모색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만이 지적 생명의 삶을 끊임없는 변화의 궤도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숱한 이데올로기 비판 소설의 얄팍함과 이념적 아집으로 스스로 부패해가는 모든 정치적 태도들의 일그러짐을 비추어보는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의 관심은 위에서 바라보는 눈길의 만족에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이런 환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라는 문제이다. 그 대답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념의 실패는 외부적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것인데, 그 이념의 정치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내부에 대한 성찰은 실행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념의 환상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이념의 밀물들이 몰려들어 지난 이념의 내적 성찰을 통한 자기 갱신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선 생각이 진전하질 못하다. 그것을 두고 한 인물은 말한다.

“왜인지 알아? 웡은 스스로에게 물었고 대답했다. 이곳은 지옥이기 때문이야, 지옥에선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생각을 연결할 수는 없어,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행동이기 때문이야.”

소설의 문제는 행동의 불가능성이 생각을 동동거리게 만드는데, 그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대화이다. 대화의 원환적 연결이 전진적 연결의 또아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대화로 가득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 역시 생각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이라는 단어의 빈도수(192)는 행동(15)과 침묵(11)은 물론이고 대화(38)의 빈도수를 압도한다. 여기에서 인물들은 상황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고립된 상황은 반복되고 사람들은 사라진다.” ‘는 부단히 발설되지만, 언어를 떠나 실체로서의 는 언제나 모호하고 불확정적이다. 인물들이 결국 어떤 결론에 다다르긴 한다. 한 인물은 게임으로서의 저항의 양식을 고민한다.

의 최종적 귀착지가 된 소설가는 끊임없는 피로 속에서도 습관처럼 일어나는 매순간의 할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작품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다.) 이 생각은 체코의 저항문인 바츨라프 벤다의 병행정치에 대한 구상으로 발전한다.(구글링으로 검색했더니, 병행정치의 정치polis의 번역이다. 다시 말해 병행공간(도시국가)이다. 이는 정치에 병행하는 것이 정치적인 효과를 겨냥하는가, 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이 물음을 굳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인 것의 정치력이라면, 그것은 하버마스(그리고 이글턴)공적 영역public sphere’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이러한 병행 공간은 1970년대 한국의 문학장을 통해 이미 훌륭하게 구현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하는 공간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렇다면 작가의 생각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여하튼 이 구상도 생각의 껍질 속에서 여전히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언어가 그 자체로서 행동이 되는 사건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문을 적는다. 후반부에 슬그머니 개입하는 소설가 는 얼마만큼의 유효성을 가진 것일까? 또한 거기에 피력되어 있는 실제 현실의 인물들과 소설론은? 그것이 언어의 수행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순수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