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선재의 『노라와 모라』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선재의 『노라와 모라』

비평쟁이 괴리 2021. 2. 11. 14:1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의 2차 독회에 제출된 심사의견 중 위 작품에 관한 대목과 심사위원회 공동의 심사평이다. 조선일보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 심사위원회 심사평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세익스피어를 가리켜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작가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작가들이 궁핍을 참으며 그와 같은 경지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영원의 전당은 결코 예약을 받지 않으며, 과거의 대가를 흉내내는 걸로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오로지 자기의 개성으로만 승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당대의 문화적 취향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런 작가가 미래의 독자에게 냉대받는 경우는 번다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한때의 취향은 크게 보면 편협한 시류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시류에 파묻힌 삶들을 되살려냄으로써 인간의 넓이와 모든 삶의 다양함과 공평함, 그리고 소중함을 일깨우며, 영원에 한걸음 다가간다. 김선재의 노라와 모라는 아주 평범한 두 인물의 내밀한 연락을 통해 그런 보편성의 감각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노라와 모라는 가장 우연한 존재들, 어쩌다 태어났고 우발적으로 엉뚱한 이름이 지어졌고, 그걸로 평생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그렇게 특이한 데도 남의 눈에는 한번도 띠지 않은 채로, 그냥 존재의 기미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도 그 나름의 삶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잘 나가는 삶보다 훨씬 알찬 삶이다. 그들은 내용도 방법도 다르게 산다. 뻐기는 사람들은 주장과 요구와 자랑으로 시끄럽지만, 노라와 모라는 멀찌감치 바라보고 대개는 말없이 곁에 있고 가끔 소곤거린다. 말보다 생각이 많고 생각이 여물수록 현재에 집착하지 않고 꿈을 키운다. 그 꿈은 그들의 우연한 생의 조각들을 무수한 관계의 뜨개질로 짜면서, 지금, 이곳을 훌쩍 넘어서는 아주 다른 삶들의 은하를 흐르게 한다.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는 영혼의 속삭임이고 영원의 음파라 할 것이다. 그 음향이 독자의 귀청을 스칠 때, 우리는 삶의 덕성을 불현듯 깨닫고 좀 더 두터운 삶과 좀 더 도타운 관계를 꿈꾸게 된다. 소설은 당장의 이익을 주지 않는 대신, 미래로 초대한다. 보들레르의 그 시구처럼. “내 아이, 내 누이여, 꿈꾸어보렴, 거기 가서 함께 나눌 자애로움을”(여행으로의 초대)(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 개별 심사위원으로서의 심사의견.

이 작품은 오늘날 소설의 일반적 추세와 유사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그의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존재들의 사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점에서 사적인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 오늘의 일반적 추세와 부응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니다. 그의 사적인 세계는 공적인 것을 대체하거나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자와 다르다. 김선재의 사적인 것들은 철저히 외롭게 존재한다. 자신의 얼굴울 다이얼 비누를 쥔 투박한 손으로 박박 문질러 씻겨주다가, 문득 숨을 멈춰 버린 아버지, 난데없이 한 가족이 되어 살게 된 두 특별한 이름의 또래들의 삶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깃들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어졌고, 자신의 소원과도 무관한 의지 너머의 인생들이다. 이런 사적인 세계들이 공적 교감의 장인 소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여기에 김선재 소설의 특장이 놓여 있다. 그는 이 하찮고 사사로운 인물들의 삶에 약간의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지극히 사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 존재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즉 비사회성의 사회적 존재성을 독자의 촉수로 감각케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넓혀 나간다. 공간적으로 그런 이름 없는 존재들이 마치 새벽 직전 밤하늘의 별들처럼 새까맣게 초롱거리고 있다는 것을 환기하며, 시간적으로 그들의 거칠고 단조롭게 반복되는 그 일련의 움직임들이 생명의 지속적 실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양방향의 점진적인 전개를 통해 노라모라가 환기하는 사적인, 즉 이름없는 존재들은 독자의 정신 속에서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그들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한편, 군림하는 공적 세계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성찰을 유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효과가 사적 세계로 공적 세계를 대체하는 추세와 어떻게 다른가? 노라와 모라의 삶은 결코 공적 세계로, 다시 말해 지배적 위치로 발돋음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소통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회적 존재성 자체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들을 둘러 싸고 있는 주위 환경이다. 그 환경에는 자연 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 주위 환경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고립무원의 세계들이 음향과 반향의 방식으로 서로를 타진하고 탐색하며 수용하고 반사한다. 그 움직임 속에는 공적 세계가 흔히 보이는 규정과 질서의 적용이 없다. 아니, 그런 규정과 질서를 해체하고 평등한 교류를 낳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공적 세계 안으로 파고든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그 형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꿈인 것 같았다. 그 정적 사이로 다시 모라가 중얼거렸다. 작고 까끌까끌한 목소리였다.

새가 울어.

……그러네.

나도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눈꺼풀 사이로 스미는 희미한 빛 속에서 또 새가 울었다.

 

이 대화는 한참 뒤,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변주된다.

 

새가 울면 기다렸다는 듯 새어들던 여명과 비가 오면 파닥거리며 빗방울을 튕겨내던 잎사귀들, 나무들. 우리는 축축한 바닥에 누워 그 소리를 듣곤 했다. 한밤 같은 한낮에, 혹은 한낮 같은 한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소리가 만든 시간과 공간 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모라는 그런 곳은 모른다고 했다. []

그렇다면 모라에게는 뭐가 있을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것.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

그런 것.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배나무 같은 것.

 

이런 풍경을 사회 생활의 모든 광경들에 배접시켜보라. 거기에 김선재의 소설이 우리에게 은밀히 전하는 권유가 있다. 표면의 삶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보다 더 풍요한 관계가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복류하고 있다고. 그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은근히 독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