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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의 미주알고주알 - 김유담의 '이완의 자세'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이웃들의 미주알고주알 - 김유담의 '이완의 자세'

비평쟁이 괴리 2021. 3. 23. 02:1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중 세 번째 독회인 2021 3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글의 일부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김유담의 이완의 자세는 남자에게 속아 폭망한 후, 세신사의 고달픈 삶을 살아 온 엄마와 실패한 무용수인 딸의 이야기다. 방금 세신사라고 했지만, 속된 말로 때밀이이고, 직업란의 표기는 자영업이다. 이 세 가지 이름을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삶의 다양성을 포괄하며, 이들 사이의 장력을 능란하게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작품의 덕성은 무너진 인생의 밑바닥에서도 삶의 활력이 넘쳐나고 있으니, 몸은 마음의 절망을 언제나 무찌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몸의 활력은 사회적 부당함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정신적 빈한함이든, 그 어떤 것보다도 앞서 있으며, 동시에 이런 부정적 기운들에 늘 삶의 이유와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그것은 인류의 진화를 여기까지 끌고 온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인류의 오늘날까지의 생존을 밑받침한 정신요소이다.

이 본능이 어떻게 소설에 발현되는가?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소설 속에는 결코 긴장하지 않는 자세로 엄마의 삶과 딸의 그것과 이웃의 삶들이 미주알고주알 낱낱이 폭로된다. 폭로라고 했지만 비리를 고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글쓰기의 태도는 그런 부정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누구나 가진 저만의 사연들과 비밀들을 주전부리하듯이 나누는 것이다. 혹은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때처럼 밀어내는 것이다. 이 무수한 잡담 요소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끌고 가는 징조단위로 기능하는 것들과 순수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정보단위로 기능하는 것들로 양분되며, 그 둘의 비중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소설의 밀도가 매우 성기다는 것을 가리키는데(밀도가 짙은 소설들은 정보단위를 최소한도로 사용한다.) 그런데도 그런 성김은 작품을 맥빠지게 하기보다는 강력한 심리적 안정성을 구축하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이 시시콜콜하고 의미 없는 사실들은 우린 이웃이오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고 그 메시지에 매우 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판 이야기의 한 전형일 수도 있고, 그것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따로 논해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역사적 맥락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1980년대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2000년대 이명랑의 삼오식당을 이어받고 있다. 전자에 대해 한국 독자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후자의 작품에 대해서는 성원이 충분치 않았다. 김유담의 소설은 다시 이 경향에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모을만한 입심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의 심성의 바닥 층위에서 관류하는 욕망의 흐름을 분석하기 위한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