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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환 선생님의 『프루스트를 읽다』 본문

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정명환 선생님의 『프루스트를 읽다』

비평쟁이 괴리 2021. 8. 5. 14:32

정명환 선생님이 그동안 읽어 오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독후감이자 분석서인 프루스트를 읽다(현대문학사)를 상자하셨다. 찾아 뵐 때마다 프루스트 읽은 소감을 말씀하시곤 했는데, 마침내 완독하시고 독서의 결과물을 내놓으신 것이다. 늘 감복하는 바이지만 선생님은 한순간도 공부를 놓지 않으셨다. 프루스트를 읽으시는 동안에도 노자와 그에 관련된 책들을 꾸준히 챙겨 읽으셨고, 그에 대한 선생님의 사색을 적은 노트를 내게 보여주시기도 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최근에 겨우 시간을 내어 선생님의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나에게 일어난 느낌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동 이상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휩싼 것은 놀람이었다. 아니 놀람들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이 복수의 놀람을 몇 개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생님은 몸이 노쇠해 가시는 가운데에도 예전의 명철한 지적 분석과 논리적 풀이의 힘은 하나도 쇠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프루스트 진술의 적확한 이해에 근거한 인간 능력에 대한 정확한 분별(가령, 감성과 지성의 분별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조적인 양자관계)을 제공하는 대목은 분석의 백미를 보여주며, 다른 한편 프루스트에 대해 매혹당하시면서도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그의 작품 뒤에 도사린, 프루스트 자신이 결코 의식하지 못했을 허위의식(상류 부르주아의 좁고 왜곡된 안목)을 끊임없이 적발하고 계신 대목들은 판단의 날카로움을 선연히 느끼게 한다.

둘째, 이 책은 지금까지의 선생님의 글쓰기가 보여주었던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두기를 일부러 버리시고, 책의 내용과 당신의 개인적 체험을 비교하고 뒤섞는 일을 하고 계시는데, 희한한 것은 그로부터 정서적 친화감보다 논리적 명석성이 더욱 예리하게 빛난다는 점이다. 그 예리함은 방금 말한 소설의 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개인사들에도 분산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그 방식과 관계없이 태도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당신이 프루스트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점에 대해 자기 분석을 행하시는 대목에서는 그 솔직함에 내 가슴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정도이다.

셋째, 노트를 열고 기억해둘 대목들을 적으면서 독서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 노트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거의 전 내용이 모두 두고 배워야 할 만큼 귀중한 참조물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옆에 두고 자주 뒤적이는 것으로 내 지적 호기심을 채워야만 하리라.

넷째. 선생님은 플레이아드 판 불어본과 일본어 번역본을 병행해서 읽으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인용 부분은 당신이 직접 번역하지 않으시고, 이형식 교수님이 번역한 한국어 번역본을 이용하셨다. 후학이 이룬 성과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부분으로서, 선생님의 평소의 생래적인 겸손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켜준다.

여기까지 쓰니, 선생님 수업을 듣던 시절이 선연히 떠오른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불문법과목을 들었는데, 간명하고도 요점적인 설명에 항상 매료되곤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교과 내용을 설명하시던 중에 가끔 내가 뭘 아나?” 하는 당신을 낮추는 말씀을 자주 하셔서 그런 말씀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3학년 때 학과장을 하시면서 학생들과의 집담회를 마련하시는 등, 불문학에 대한 의욕을 북돋아 주시면서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심리적 억압과 정신적 고뇌에 시달리던 학생들을 위무해주시곤 하였었는데, 그런 세심한 배려를 하셨던 건,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몸에 밴 태도로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나는 당시 3학년 초에 친구 백승룡이 연탄가스로 사망한 걸 계기로 현실에 대한 증오감이 과장적으로 부풀려져 있어서, 선생님의 그런 배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뚤어진 방식으로 반응해 선생님께 반항조의 말로 대꾸하던 게 지금도 부끄럽게 기억난다. 내가 그런 왜곡된 마음을 교정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당시 선생님의 따뜻한 말씀들이 결국은 나의 교정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선생님의 글쓰기는 대상과 사례와 주제가 아주 구체적이고 명료해서 말 그대로 리얼한 지식을 접하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런 지식 내용은 최종적으로 우리 현실의 실제적인 문제들과 엄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글들을 가만히 음미하다보면 현실에 대한 아주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가령, 레비-스트로스나 르 클레지오의 반문명주의가 어떻게 원시적인 삶을 잘못 이끌고 갈 수 있는가, 라는 점에 대한 성찰은, 아파트에 살면서 월든을 읽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깨우침을 제공해 줄 것이다.)

한데 한국의 독자들은 이런 구체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힘겨워한다. 아마도 그 지식이 도출되기까지의 논리적 과정을 좇는 데에서 힘이 부치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구체적인 지식보다는 두루뭉술하게 선한 것을 칭송하는 관념적인 진술들을 좋아하고 그렇게 말하는 분들을 귀감으로 삼곤 한다. 궁극적으로 그런 막연한 말들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여하튼 선생님의 책이 유발한 이 놀람들을 언젠가는 나 스스로 명료하게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그런 수준의 독후감을 선생님께 돌려 드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그렇게 나를 연단할 수 있을지 무척 회의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소원이 계속 실감을 가질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만수무강하신다면 내가 비록 그 소원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더 좋을 일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