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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도래와 문학 번역의 미래 본문

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AI 시대의 도래와 문학 번역의 미래

비평쟁이 괴리 2023. 7. 1. 07:53

※ 아래 글은 '한국문학 번역원'이 개최한 심포지엄, 'AI시대의 도래와 문학 번역의 미래'(2023.05.26. 11:00-18:00,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된 것이다. 실제 기조 강연에 쓰인 PPT와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이 글을 포함, 심포지엄 전문은 한국문학 번역원 홈페이지(https://ltikorea.or.kr/kr/board/dataevent/boardList.do)  KLWAVE(https://klwave.or.kr/www/main.do)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문학 번역원'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AI 시대가 도래했다. 1994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몬Herbert A. Simon AI 문학비평을 있다고 허풍을 [1] 해도 무모한 장난이라고 치부할 만했다. 그러나 20 (2015) 면모를 완전히 일신한 AI 전까지 절대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지 못하리라고 예측했던 바둑에서 인간 경험의 역사가 구축한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A.I 모든 대국에서 승승장구했고, 이제 프로기사들에겐 A.I 훈련하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AI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은 인간만이 하던 일을 대신 있는 무언가(혹은 누군가) 출현했으며, 나아가 인간보다 하기도 하는 사태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게다가 이제는 여기(餘技)만이 문제가 아니다. 2023 ChapGPT 등장은 정신 분야라고 통칭할 있는 모든 곳에서 AI 인간을 대신 내지는 능가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화하였다. 그러니까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장소들에 아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이방의 검투사가 난입한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AI 1956 컴퓨터 과학자, 매카시John McCarthy 의해서 창안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근무하던 햄프셔의 다트머스Dartmouth 대학 실험실에서,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할 있도록, 언어를 알고 추상과 개념들을 만들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 개선해나가는 기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2]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태는 AI 원초적 구상이 실제로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인간을 능가하는 지적 존재(스스로 개선해나가는) 지구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여하히 대우할 것인가? 정신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모두를 장식한 바둑의 영역으로 들어가보자. 당장 알파고 무리를 프로기사로 등록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될 있다. 앞으로 AI들의 대국에서 우승 샴페인이 터뜨리는 사건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들은 훈련 도구로서만 시방 작동하고 있는가?

문제는 AI 인간과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기 때문에 야릇한 양상들을 야기한다. AI 인간과 같은 사유를 하는 지적 생명이라면, 인간은 AI 피나는 경쟁과 길다란 협상에 들어가야만 하리라. 그러나 현재의 수준에서 AI 생각을 하지 못한다. 대신 -러닝을 통한 정교한 연산으로 움직인다. 이에 대해 알파고 제작 프로그래머이자, 현재 구글의 딥마인드협회 최고경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 이렇게 확인한다. [오늘날]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활용되는 AI [] 진짜 AI 아니라, 통계알고리즘이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3]

허사비스가 진짜 AI라고 생각하는 것은 통계 알고리즘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간단하게 말해 그건 “‘주어진 데이터 대한 정교한 계산기이기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요점이 명확해진다. 현재의 AI 데이터를 받아야 한다는 . 데이터를 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간단한 사실만 확인한다면, 현재적 수준에서 AI 계산 기능에서는 인간을 능가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 행사하지 못한다, 말할 있다. 차이는 인간 행동의 의미와 AI 행동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차이를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 오늘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는 번역의 주권에 대한 것이다. 어떤 번역가가 특정한 언어로 작성된 어떤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있어서 AI 도움을 받았다면, 이때 번역을 실제로 행한 주체는 누구인가? 이상의 주체가 가정될 , 각각이 행한 범위와 기능은 무엇인가? 번역물에 대한 권리와 책임은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

이상의 문제들에 근거해서 인간과 AI사이의 차이와 관계, 그리고 공진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다.

 

2. 문제의 맥락

 

이런 사태가 생긴 것일까? 앞에서의 언급에 의하면 오늘의 AI 도구에 불과한 듯이 보인다. 도구는 인류가 지적 생명으로 진화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요인이며, 인간은 이것을 만들고 언제나 능숙하게 사용해 왔다. 인류에게 유익한 보조자의 역할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AI 강력한 도구적 기능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과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허사비스는 이어서 말한다. 기제들이 민주주의 사회에 끼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마도 미디어 플랫폼을 만든 사람들은 시초부터 나쁜 의도를 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차적 효과는 [의도치 않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타난다. [당황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아이고 이게 뭐야!, 그리고 서둘러 닫아버린다. 하지만 이는 말들이 떠난 다음에 마구간을 닫아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는 AI 작동할 , 오로지 AI 속하지도 않으며 인간에만 속하지도 않는, 존재가 공동으로 작동하는 3 층위가 발생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층위는 순수한 계산 기능으로서의 AI 활동에 인간 정신의 무언가가 개입함으로써, 순수한 인간의 정신 활동으로는 창출할 없는, 나아가, 인간의 의지로서 조절·관리하는 것도 난망한 매우 인지적 능력을 증강시켜, 인간 활동을 통해, 통제가 어려운 사회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를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빌려 정동(情動)효과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AI 활동에 개입하는 인간 정신의 무언가가 인간 스스로의 여러 가지논리적, 윤리적, 맥락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등등 모든 현실적 효과에 작용하는운산을 통해 조직화되고 정리된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AI 능력에 접해서 무한정의 가능성으로 열리는 인간의 정신적 충동, 정확하게 말해, 무언가를 해볼 있다, 해보자 의욕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런 의욕 둘러싸고 배출되는 감정물질들이 바로 정동affects이다. 이런 의욕 정돈된 사고 이전에 솟아나는데, 사고를 현실화하는 기제의 힘이 너무 커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예측불가능한 무한의 효과를 야기할 있다.

이런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그림을 그려보자. 어린 아이에게 아주 고성능의 칼이 주어졌다 하자. 이때 칼의 제작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제작공정이 대장간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기술을 도입하고 손을 놓았다. 기술의 결과로 고성능의 칼이 제작되었는데, 그걸 정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가 가지게 되었다. 어린아이는 칼을 가지고 무엇을 것인가? 마침 어린이 앞에 닭이 마리 있다고 하자. 어린이는 칼로 닭을 해칠 있다. 아니면 닭을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 삵에게 칼을 휘둘러 닭을 보호할 수도 있다. 또는 주변에 널린 나무들을 베어서 닭이 대피할 있는 닭장을 만들 수도 있다. 외의 가능성 또한 무한히 열려 있다. 다만 칼의 매력에 의해서 아이가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유는 AI 개입해서 인간이 벌이는 활동의 사회적 효과가 가치에 있어서나 규모에 있어서나 예측불가능하게 폭증하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모호한 부분은 가지이다. 첫째, 칼의 제작자가 대장간에 투여한 기술을 제작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사실 여기에 AI 진화의 핵심이 있다. 20세기에 AI 아이디어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 것은 데이터 계산 기능의 정교화만으로 인공지능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데에 있었다. 인공(人工 artificial) 장인artisan에서 나온 말이다. 어원적으로도 인공지능은 탈인간적인 아니라 인간친화적이다. 과연 인공지능의 도약은 인간의 행동(신경망 회로) 모방한 데서 나왔다. 나무 위의 쓰레기 청소 동물이었던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지적 생명으로 진화한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는 호기심 속에서 오류에 빠지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진리의 영역을 넓혀 나가게끔 방법론, 필자의 용어로 말하면, 자발적 시행착오 학습 무한 나선형 순환이었다. 학습방법론이 AI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용어를 달고 부착된 순간, AI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AI 인간과 달라짐으로써 인간을 능가한 아니라 인간을 닮음으로써 인간을 추월하게 것이다. 하나의 모호한 지점은 AI 의존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상태를 어린아이의 그것에 비유할 있는가이다. 이는 지적 수준의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인간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관계는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효용성의 위력 때문에 일단 쓰고 보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상적 상황에서 그런 관계를 실감나게 느낄 있도록 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비유가 들어간 것이다.

 

3. 기능의 분할

 

자신이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도구를 일이 자아낸 엄청난 사회적 효과에 놀란 어린아이는 언젠가 문제의 원인과 심각성을 알아챌 것이다. 비록 마구간을 벗어난 말이 마구 날뛸지라도 언젠가는 고삐를 단단히 틀어쥘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벌이게 , 정동효과 안에서, 막연한 의욕 속에서 인간의 잠재력에 기대를 품고 완성 쪽에 내기를 걸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AI 등에 올라타 포효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충동적이고 막연하면서도 맹렬히 차오르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AI와의 협력은 인간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AI에서 연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AI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인간의 잠재성이 인간의 현실영역을 쓰나미처럼 덮친 사태라고 있다. 이를 인지 과부하 효과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번역에 적용해 보자. 아마도 사회 관계망에서 현상되는 결과와는 정반대로 긍정적인 효과가 예기치 않게 나타날 것이라 전망할 있다. 사전과 AI 번역기의 차이는 사전은 단어들의 뜻을 고립적으로만 제시할 있는 비해, AI 번역기는 전체 텍스트의 맥락을 헤아려, 문장 수준을 넘어 담론 수준에서 적절한 뜻을 제공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로 유명했던 초창기 서정인의 작품 「후송」에 나오는 대목이다.

 

“후송보내주십시오.”

성중위는 이마에 땀을 씻으며 말했다.

”어디가 아프시지요?"

군의관은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귀가 이상입니다.”

 

만일 한영사전을 인격체로 간주해서 그에게 영어 번역을 맡기면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문장에서 그는 목적어와 동사를 나눌 없을 것이고, 번째 문장이 등장한 이유를 모를 것이며, 이마에 땀을이라는 옛날식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번째 문장에서는 사무적인 말투로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저작(咀嚼)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귀가 귀가(歸家) 뜻으로 번역할지도 모른다.

AI 번역기는 문장을 말끔하게 처리할 있다. 그는 대목이 한국의 군대에서 이명 현상에 시달리는 장교가 자신의 이상을 치료하려는 목적으로 후방으로 후송을 가기 위해 필요한 진단서를 받고자 군의관과 대화를 나누는 광경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주인공의 신경증적 불안에 시달리는 모습과 그에 무관심한 군의관의 사무적인 태도를 대조시킬 있을 것이며, 한국인의 어법의 변화에 헤아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동작을 정확히 옮길 있을 것이다.

만일 번역가가 AI번역기를 참조한다면 인용문과 같은 말끔한 문장들을 외국어로 옮기는 데에 스스로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번역을 수행한 주체는 AI 번역기인가? 번역자인가? 아니면 번역기의 개발자인가? 언뜻 보아서는 AI 번역기가 번역 수행 주체라는 단정이 가능할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방금 내린 단정은 원본과 번역문 사이에 적확한 이동이 가능하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실제로 대목을 복수의 AI 번역기에 넣고 번역을 의뢰해 보았다.

 

(1) 네이버 파파고 번역. 2023.05.08. 3:50 Am

Send me a draft.

Sung said, wiping his sweat from his forehead.

What's wrong with you?

The military doctor asked in a businesslike tone.

That's all I can hear.

 

(2) 마이크로소프트 Bing(https://www.bing.com) 번역. 2023.05.08. 3:55 Am

Please evacuate.

Lieutenant Sheng said, wiping the sweat from his forehead.

Where does it hurt?

The military doctor asked in a clerical tone.

It's more than homecoming.

 

(3) chatGpt(https://chat.openai.com) 번역. 2023.05.08. 4:14 Am

Please send my regards.

Captain Sung said, wiping the sweat off his forehead.

Where does it hurt?

The officer asked in a businesslike tone.

I have a problem with my ear.

 

번역에 모두 오류가 발견된다(밑줄 부분들). 이는 의뢰된 대목에 대한 충분한 맥락 설명을 번역기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번역된 영어 문장 , 오류가 Please send my regards. 다시 ChatGPT에게 주고 한국어로의 번역을 요청하였더니, 인사를 전해주세요라는 정상적인 번역을 보내주었다. 아마 맥락을 알고 있었다면 번역기는 후송보내주십시오.라는 문장을 정확하게 옮겼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AI 번역기의 현재적 한계이기도 하다. 번역기에게 소설 「후송」의 길다란 줄거리와 그에 관련된 1960년대의 한국의 군대문화와 필경 작가가 유념했으리라고 짐작되는 1960년대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당대 한국인들의 정신적 경향과 삶의 태도 등등을 여하히 주입할 것인가? 현재의 수준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현재의 수준에서는 번역가가 직접 나서서 번역을 보완해야 몫이 아주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AI 번역기를 참조한다 한들, 번역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인간 번역가에게 돌아간다고 판정할 수도 있다.

이보다 심중한 문제가 있다. 오류 부분을 접어두고 다시 들여다보면 AI번역기의 번역들이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수가 있다. 사실은 가지 점으로 풀이된다. 하나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 11 대응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은 각각 다른 체계 혹은 패러다임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명하게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직역이냐 의역이냐, 라는 논쟁이 나온다. 직역은 원언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한다는 의도를 가지는데, 사실은 사전을 가지고 축자적으로 번역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번역은 도착국의 언어에 동화되지 않아, 도착국의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의역 도착국의 언어로 이해할 있도록 단어와 문장과  순서를 바꾼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실상 그것은 번안으로 화할 가능성이 크다. 앙트완느 베르만이 적시했듯이, 좋은 번역은 언어의 낯설음을 유지시키면서, 그것을 알고 싶다는 충동을 도착국의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번역이다[4]. 필자는 이를 호환성의 최대화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언어들이 각각 상대방의 언어를 통해 언어 세계의 경험과 세계관을 안의 경험으로 끌어들이고, 나의 언어 또한 상대방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달하면서 서로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최적의 길이 바로 호환성을 최대로 높이는 것이다.

번역의 문제는 일치 아니라 호환이라는 , 이것은 번역에 있어서 객관성보다는 상호주관성 중요한 관계 형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상호 주관성을 이끄는 존재는 현재로서는 번역기라기보다 번역가라 하는 타당할 것이다.

번째 풀이 지표는 이에 이어진다. 상호 주관성은 복수의 당사자들 각각에서 저마다의 고유한 삶의 패러다임을 전제할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을 일상적 차원에 옮기면 흔히 말하는 패턴 된다. 세상의 모든 삶의 양상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아니라 특정한 유형들로 모을 있다. 혹은 그렇게 모을 때만이 사태에 대한 파악이 용이해진다. 그것은 사실 자체라기보다 사실들의 재구성이며, 재구성을 통해서 사실들에는 현실에 유용하게 작용하는 기능들을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 구성 방법은 인류의 진화에서 중요한 방법적 기제로 작용해 왔다. 그런데 AI 딥러닝 역시 같은 기제를 통해 발전한다고 추정할 있다.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데미스 허사비스의 최근의 활약이다. 그는 최근 생체 단백질 접힘 구조를 밝히기 위한 -러닝 연구 알파폴드Alphafold 발주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알파폴드 프로젝트의 기본 아이디어는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 생물학에서의 아주 오래된 화두였다. 다만 단백질이 워낙 사슬을 이루고 있어서, 구조를 밝히기가 어려웠는데, 허사비스가 개발한 AI, 알파폴드 2억개에 달하는, 현재 알려져 있는 거의 모든 단백질들의 3차원구조를 예측해낸[5] 것이다. 성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최근에는 AI 통해 고도화된 단백질 디자인은 여태 존재하지 않았던 단백질들까지 만들어낸다[6]라는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화제는 AI 딥러닝 알고리즘이 무차별적인 시행착오의 반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패턴 학습을 고도로 정교화되고 미세화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절차를 동반하였다는 점을 확신케 한다. -러닝은 결코 패턴을 버린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은 AI 능력이 구조에 편중되어 기능들이 실행되는 현실의 사실들이 우발적으로 야기하는 자발성에서 지식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을 낳는다.

점이 번역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아니라, 각각의 AI 저마다 최적의 번역을 지향하지만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개의 번역을 동시에 인정하는 인간의 사고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름은 결국 AI 번역 능력이 창의적인 수준에까지 이를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가장 좋은 번역을 향해 올인하는 대신, 전혀 새로운 번역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로는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모의실험을 해보자.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Le cimetière marin」의 유명한 시구인

 

“Le vent se lève !… il faut tenter de vivre !”

 

이다.

시구를 고른 것은,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시구인데다, 문장 모두 번역의 까다로움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선 문장, Le vent se lève ! 사전(Le Grand Robert) 참조하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라는 번역이 적당하다[7]. 그런데 이는 바람이 분다 번역되는 통상적인 구문 Il fait du vent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번역가들은 동사 se lever(일어나다라는 )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독특한 번역을 해보려고 애썼다. 그래서 박은수와 김현은 바람이 인다!라고 번역[8]했고, 성귀수는 바람이 일어난다[9] 번역하였다. 일어섬 뜻을 강조했다고 있다.

번째 문장, il faut tenter de vivre ! 표현이 묘하게 뒤틀린 것이다. 통상적인 어법으로는 il faut vivre!라고 해야 것이고, 이는 살아야 한다! 번역될 있다. 그러나 tenter de 사이에 끼어들었다. ~ 기도하다라는 뜻이다. 때문에 해석이 까다로워진다. 한국의 번역들 역시 변형에 민감하였다. 그래서 방금 인용한 번역가들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살아보도록 해야지!” (박은수)

 

“살려고 애써야 한다!”(김현)

 

“살아야겠다!”(성귀수)

 

“살아보자꾸나!”(필자 임의의 번역)

 

번역들은 해당 시구에 대해 특유의 시적 느낌을 부여하려고 애쓴 결과라고 있으며, 그만큼 창조에 대한 의지가 배어 있다고 있다.

시구를 AI 번역기에 맡겨보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1) 네이버 파파고 번역. 2023.05.08. 1:10 Pm

바람이 분다!…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2) 마이크로소프트 Bing 번역. 2023.05.08. 1:15 Pm

“바람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 chatGpt(https://chat.openai.com) 번역. 2023.05.08. 1:05 Pm

“바람이 일어납니다!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번역들은 아주 실망스럽다. 우선 존칭으로 번역한 , 해당 번역기가 발레리 시구에 대한 인문학적 정보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적 수준에서 번역기들에 정보가 빈약하게 축적되어 있다고 수밖에 없다. 다음 문장 모두에 대해 번역은 거의 축자적 번역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바람이 일어납니다 바람이 인다라는 번역과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는 se lever 사전적 일어나다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일 뿐이다.

유일하게 마이스로소프트 Bing 번역만이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 잠잠한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번역했다. 아쉽게도 표현은 시적인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지나치게 길다. 살려고[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번역기가 마치 합의를 듯이 제시한 번역도 사전의 뜻을 그대로 대입한 것이라고 수밖에 없다.

모의실험은 지금까지 필자가 추정한 AI번역기의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첫째, 현재적 수준에서 AI 번역기는 자동 번역기로서의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AI 평범한 번역의 최대치까지 수는 있으나, 창조적인 수준으로 넘어가지는 못한다는 , 그리고 문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보인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말하면, AI 번역을 떠나 모든 분야에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있다. 과학지가 ChapGPT 출현을 두고 지식의 비약An intellectual leap이라는 찬탄조의 제목을 붙이면서도, ChatGPT 학생들이 리포트에서 변별력을 찾을 없는 에세이들을 광범위하게 만들어낼 있다[10] 우려한 것도 같은 얘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와 다르다 점을 인간의 사고에 아직 못미친다 고쳐야 것이다. 언젠가 AI 창조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AI 자발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단계로 들어가야 하리라. 시행착오로서의 오류가 아니라,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는 계기로서의, 착오와 실패와 실수를 의도적으로 감행하는 일을 하게 것이다. 그때 비로소 기능의 이상이 구조를 변형시킨다 놀라운 진화적 역설을 체험하게 되리라. 그리고 시점이 AI 기계에서 지적 생명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인간이 AI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순간을 예상하고 인간은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한다. 준비가 여하히 진행되느냐에 따라 인간과 AI 미래의 관계가 공멸과 공진화라는 극단 사이에서 요동치게 것이다.

번역이라는 사안도 그러한 거대한 미래 예상의 부분에 당연히 해당한다. 번역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는 바로 소통 형식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 지위적 관계

 

지금까지의 기술을 통해 현재적 수준에서의 번역가(인간) 번역기(AI) 관계에 대해 나름으로 짐작들을 하시게 되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관계가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분할되지 않는다는 점도 충분히 인지하셨으리라 믿는다. 오늘의 자리에서 필자의 역할은 특정한 판단을 내리는 아니라, 문제에 운을 실어 의견의 바람을 띄우는 일이라고 알고 있다. 강한 주장들은 오늘 발표자로 참여하신 분들과 더불어 차후에 이에 대해 논의할 모든 번역 관계자를 비롯 번역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의 몫이다.

하나의 운이 남은 듯하다. 앞에서 기능상의 분할(혹은 중첩) 대해 얘기했다면, 현실적인 문제, 사회적 권리 혹은 지위에 있어서, 번역가와 번역기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자리에서 자세한 말을 해주실 발표자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본적인 문제만 제시하고 마치고자 한다.

우선 지위적 문제와 관련하여 또렷이 유념할 사항이 있다. 오늘날의 상황은 AI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적 생명이어서가 아니라 특정 부문에서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한다는 때문에 발생하였다. AI 존재 자체가 아니라 AI 수행이 문제의 초점이다. 수행의 영역 바깥에서 AI 아직 기계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AI 대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에 난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모든 행동에 자율권을 보장받되, 계약을 통해서 그걸 획득해야 하며, 사후에 책임이 뒤따른다. 반면 AI 인간의 명령을 받아서 일을 하며, 자율권이 주어지지도 책임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AI 쪽의 자율권과 책임은 AI 제작사에게 귀속될 같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왜냐하면, AI 사용이 유상인가 무상인가에 관계없이 공공 이용 시설(혹은 범용 서비스)로서 배포될 경우, 사용의 권리와 책임의 영역에서 제작자가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동 결함에 대해서는 서비스 제공자가 감당하지만, 작동의 성과에 대해서는 귀속 주체가 모호해진다.

AI 도움을 받은 번역 최근 소란을 일으킨 것은 이런 모호성 때문이다. AI 사용했을 경우, 번역 성과에 대한 권리를 번역자가 독점할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에 더해, 윤리적인 책임을 묻는 데까지 이의가 발전하였다.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번역자 스스로 이룬 번역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공지능의 작동자인 AI 인간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AI 도움을 받은 번역은 사전을 뒤지는 것과는 다르다고 간주된다.

얼마나 의식적인가에 관계없이, 문제 제기는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기술로 충분히 알게 되었듯이, AI 비약적 진화는 딥러닝이라는 기제(dispositif) 개발에 힘입었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신경망회로를 흉내내어, 인간의 지식 습득 방법인 자발적 시행착오 지식 생산 방식으로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AI 존재가 아니라 그의 활동이 인간과 다름없다 점이 AI 인간과 동격에 서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컴퓨터의 고유한 능력인 입출력의 적확성과 계산 속도와 정보 처리 용량을 보탬으로써 AI 인간보다 더욱 신속하고 정확하며 다량의 일을 처리할 수가 있게 되었다고 있다.

그러나 활동 방식이 인간적이라고 해서 인간과 동일하게 간주될 있는가? 인공지능은 지능의 특정 부분에서는 인간과 같거나 인간을 능가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저 기계일 따름이다. 사유 초점을 맞추어보자. AI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정보의 패턴을 읽고 정보의 구조와 의미를 측정할 있다. 그러나 AI 새로운 일을 계획하거나 주어진 정보를 해체·재형성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AI 목표는 주어진 정보에 대한 가장 올바른 해독이다. 목표가 그렇기 때문에, 정보를 자유롭게 바꾸어가면서 변형하여 새로운 사실을 도출해내는 일은 수가 없는 것이다.

점에서 본다면 AI 도움을 받은 번역은 그대로 도움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AI 인간적 방식의 작동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다. 이런 갈등 속에는 인간의 존재 형상에 대한 특정한 관념에서부터, AI 출현에 대한 인간의 기대와 불안, 인간과 AI 공존 양식에 대한 아직 안개 속에 있는 궁금증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 , 인간을 포함한 지적 생명 관한 온갖 질문들이 부글거리며 좌충우돌하고 있다. 갈등의 과정 자체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모든 귀를 열고 허심탄회히 토론할 때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추론에 대한 신뢰와 인정을 바탕으로 인간과 AI 공진화의 길을 열어가야 것이다.

 

 

 

 



[1] 「문학비평: 인지과학적 접근」, 정상준 역, 『문학과사회』, 1995년 겨울, pp.1451-1492. (원본 출처: Stanford Humanities Review, 4-1, 1994)

[2] Matthew Sparkes, An intellectual leap, New Scientist, 2023.04.22., p.12.

[3] LIA va accelerer les avancees scientifiques, Pour la science, No 547. 2023.05, p.65

[4] Antoine BERMAN, L'épreuve de l'étranger , Paris: Gallimard, 1984

[5] LIA va accelerer les avancees scientifiques, Pour la science, ibid.,  p.63. .

[6] Michael Eisenstein, AI-enhanced protein design makes proteins that have never existed, Nature Biotechnology, V.41. 2023.03. p.303. 자연과학자가 아닌 처지에서 논평이 조심스러우나, 필자의 이어지는 문단은 그럴 가능성에 유보를 두게 한다.

[7] grandrobert.lerobert.com/robert.asp. se lever 항목.

[8] P. 발레리, 『발레리 시선, 박은수 옮김, 삼중당문고 No. 128, 삼중당, 1982, 중판, p. 196; P. 발레리, 『발레리』 -김현 역주, 혜원세계시인선 No. 3, 혜원출판사, 1987, p.222

[9] 폴 발레리,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성귀수 옮김, 아티초크 빈티지, 2016, p.96.

[10] Jereym Hsu, An intellectual leap, New Scientist, loc.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