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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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윤혜준 교수의 바로크와 나

비평쟁이 괴리 2013. 3. 29. 02:23

윤혜준 교수의 바로크와 ''의 탄생 - 햄릿과 친구들 (문학동네, 2013)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윤교수의 드넓은 교양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바로크와 나를 연결시키는 그 아이디어가 계발적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윤교수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다.

 

윤혜준 교수님,

보내주신 책, <<바로크와''의 탄생>> 잘 받았습니다.

바로크 시기에 ''의 탄생을 보신 것은 매우 흥미로운 착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분열'이 있어야 했다는 점에 착목한다면 윤교수의 관점은 매우 시사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의 탄생을 '근대'라는 '존재양식'의 태동과 연결시키는 편인데, 그 근대는 시기적으로는 아주 다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업혁명기일 수도 있고 르네쌍스기일 수도 있으며, roman이 태어난 12세기일 수도 있고 또 '일리아드' 다음의 '오디세이' 시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이건 Massimo Fusillo라는 이탈리아 소설연구자가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분산성을 저는 '모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적으로 '모듈적인 것modularity'의 발명은 인류의 진화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들이 자주 있습니다.

저는 막연히 근대의 문화적 모듈은 르네쌍스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해 왔었는데, 윤교수의 책을 보고, 좀 수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미술에서도 화가가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한 게 르네쌍스 후기 유럽 북부에서부터라고 미술사가들이 말하고 있으니, 그것은 윤교수의 관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프랑스 문학에 '바로크' 개념을 도입했던 Jean Rousset가 훗날 자신의 생각이 과장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르네쌍스적 조화적 전체성과 바로크적 분열적 전체성이 어쩌면 같은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모처럼 진지한 성찰을 해주시게 한 데 대해 감사드리며, 꼼꼼히 읽어 보겠습니다.

윤교수님처럼 이렇게 폭넓은 시야를 확보한 영문학자를 만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건필하셔서 저 같은 게으른 동학에게 자주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명교 드림.

 

선생님,

과분한 칭찬과 소상한 소감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전자만을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에 '상기하자 바로크!'를 외친 것이지요.

 

윤혜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