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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성의 복원과 구조의 다면성 -『라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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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성의 복원과 구조의 다면성 -『라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비평쟁이 괴리 2023. 11. 2. 18:36

『라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교학사, 2000)는 국내 연구자들의 라신 이해의 방향과 수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선, 수록된 글들은 60년대 신구논쟁을 기점으로 대체된 라신 해석의 새로운 방향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정신분석(정희수), 마르크시즘(심민화), 구조주의(정병희), 연극기호학(신은영), 주제비평(이윤옥), 상상력 이론(주경미), 해체 비평(이화원) 등 60년대 이후 최근까지의 신비평의 이론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예전의 해석에서는 무시되었던 후기 저작을 재조명하고(김애련), 라신 희곡의 공연적 의미를 밝힘으로써(장성중) “문학의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 연극의 지향과 보조를 맞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라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집성물이자, 동시에 현대 문학 이론들의 진열장이다. 한 사람의 작가 혹은 하나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해서 현대의 다양한 문학 이론들을 다채롭게 펼쳐보고자 하는 시도가 드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다양한 이론들이 하나의 구심점에 의해 지탱되어 유연한 탄력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현대 비평의 비평적 전환에,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동일한 뿌리를 대고 마음껏 자라난 가지들처럼 보인다. 이 같은 뿌리를 살펴볼 때만 언뜻 보아 산만히 흩어진 글들의 유기적 관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란 무엇으로 요약될 수 있는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두 개의 이론적 담론이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라신의 비극에서 ‘비극’의 정신을 복원하는 것에서 나온다. 비극을 비극답게 하는 것이 그 복원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비극이 비극답지 못했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 이전 시대의, 요컨대 랑송주의의, 라신 해석은 라신의 텍스트를 비극으로 보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관점의 명백한 선회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이론적 젖줄을 댄 고전주의의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비극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극은 삶의 실상이라기보다 하나의 ‘기능’(기능주의적 관점에서의)이었다. 기능주의적 관점에서의 기능이란 ‘무엇을 위한’ 작용이다. 다시 말해, 비극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근본적인 목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비극 옆에서, 비극의 협력에 의해, 한껏 강화될 그 목표는 바로 ‘카타르시스’, 즉 “공포와 연민”을 통한 감정의 정화였다. 이 감정의 정화가 왜 필요했던가?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범할 수밖에 없는 과오는 관객에게 이중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우월한’ 인물과의 동일시는 관객을 심리적으로 우월한 상태로 격상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우월한 인물의 과오는 관객에게 그것이 그 자신에게는 더욱 빈번히(아니, 차라리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과오임을 인식시키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을 주입한다. 과오의 잠재성과 금지에 대한 의무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비극이 개입한다. 비극은 잠재적 과오를 상상 공간에서 대리 체험함으로써 과오의 무게를 깨달으면서 동시에 과오의 결과가 가져올 위험을 모면케 해주고, 마지막으로 마치 몸의 때를 씻어내듯이 과오의 가능성을 때마다 씻어내도록 해준다. 공포와 연민을 통한 감정의 정화라는 카타르시스는 결국 가상 체험의 비법라고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 비법은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관객의 유보없는 체념과 수락을 유도한다. 다시 말해, 고전 비극은 절대 왕권에 대한 교양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는 기능을 가졌던 것이다. 
60년대의 신구 논쟁에서 ‘라신’이 논쟁의 진앙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바르트의 수사적 표현처럼 “그 누구보다 학교 교실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작가”(p.72)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작품이 비극의 이데올로기가 가차없이 드러나는, 혹은 이데올로기들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낡은 비평은 라신에게서 글쓰기의 솜씨만을 보았지만 현대 비평은 글쓰기의 비극성 그 자체를 읽어, 절대 왕권 혹은 넓혀 말해 현존하는 질서의 억압성과 그 안에서 생존하는 자의 비극성을 선명히 부각시키게 된다. 낡은 비평은 작품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은폐한다. 반면, 현대 비평은 라신 비극을 순수-비극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혹은 절대 왕권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강력한 이념적 발언으로 읽는다.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골드만이 비극을 “세계관”(p.13)으로 파악할 때, 스타로벵스키가 “비극적 인식이란 인간이 나약하고 죄 있는 존재임을 아는 기이한 기쁨”(p.121)임을 밝혀 낼 때, 빛과 어둠의 투쟁이라는 상상 체계 속에서 포착된 라신은 “심연을 향한 숱한 전락에도 불구하고 느리고도 무거운 상승을 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 초월성을 부여”(p.140)함을 발견할 때, 라신의 비극은 순수-비극이 된다. 이로써 비극은 부차적 기능이기를 그치고, 생생한 실존이 된다. 다른 한편, 모롱이 라신의 비극을 “여자와 가축, 모든 재산을 독점한 아버지와 같은 절대권자가 존재하고, 친족 관계로 얽힌 […]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피압제자의 몸부림”(p.44)으로 읽을 때, 또는 바르트가 라신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서 “[파국이라는] 결정적 순간의 집요한 되풀이”를 통해 “숙명적 사랑”(pp.67~68)을 영원히 기억시키는 것, 혹은 “비극의 언어가 스스로의 좌절을 신화하화면서, 하나의 ‘지속’을 이끌어 가는”(p.77) 절차를 보았을 때, 또는 해체 비평이 라신의 비극에서 절대 왕권의 표상적 세계에 대항하는 비표상적 욕구의 돌출을 찾아낼 때(p.160), 그리고 라신의 종교극에서 “비극적 아이러니”와 동시에 “신적 아이러니”를 깨달을 때(p.193), 라신 비극은 순수-비극의 세계를 보여주는 과정 그 자체로서 절대 왕권에 반대하는 강력한 “내재적 부정성”의 이념적 담론이 된다.
비극의 복원은 문학 바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문학을 해방하면서, 동시에, 문학 그 자신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치적 상상물로 만든다. 이것은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한다기보다 차라리 근대 이래 문학의 존재 양태를 적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17세기의 라신에 대한 현대적 이념의 투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라신의 텍스트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문학성의 발굴로 볼 것인가? 텍스트의 ‘의도’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이 문제에 필자들이 망설이고 있다 할지라도, 문학성이 작가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끊임없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현대적’ 해석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는 문학성의 핵심 속으로 진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두 개의 이론적 담론은 이 이데올로기적 전복의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하나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를 기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작가의 전기적 사실로부터 작품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는 원론적으로는 “작가와 독자, 또는 관객이 서로 공감하는 만남의 장소로서”(p.26) 작품을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리킨다. 똑같은 정신분석이지만 마리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이 “작가를 해명하기 위한 자료”로서 작품을 취급하였다면, 모롱은 “완전히 문학적인 비평을 확립”하기 위해 작가의 “개인적 신화”를 통해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보편적 무의식의 가정이든, 혹은 집단의 ‘가능한 의식’으로서의 세계관이든(p.9), “세계의 공포를 받아들이”는 “언어 활동”(p.55)의 자율적 움직임이든 작가로부터, 혹은 욕망하는 “불행한 시선”의 통제할 수 없는 움직임이든, 작가를 배제하고자 하는 비평적 태도의 밑바닥에는 작가-작품 사이에 이어진 당연한(자연스런) 연관을 끊어버림으로써 작가의 의도나 체험에 근거한 이성적인, 또한 그렇기 때문에, 사무적인 이해를 넘어서, 텍스트가 환기하는 “비이성적인 정열”과 텍스트의 구조 자체가 의도하는 이성적 통제 사이의 긴장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놓인다. 이러한 의지가 확대되면 텍스트를 그 자체로서 움직이는 구조적 ‘활동’으로 놓는다. 텍스트의 심리를 넘어서 기능을 분석하려는 움직임으로 뻗쳐 나간다.
이 기능은 기능주의적 기능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기능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기능’은 목적론이 배제된 기능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기능이 아니라 활동하는 체계 혹은 그 체계의 의미론적 국면들을 그대로 가리킨다. 그 활동하는 구조의 활동성의 의미를 바르트의 다음 말이 적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대해 오직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의 관계 하에서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성급하게, 다시 말해 체계가 가능한 한 폭넓게 구축되기 전에 심리적, 사회적, 물리적인 다른 결정 요인들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된다”(p.83). 
이 기능에 대한 주목은 텍스트의 이념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의 미학적 차원에 접근케 한다. 라신의 비극이 하나의 기호 체계라면, 그 기호 체계는 무엇보다도 ‘연극’의 이름 하에 구축된 체계다. 따라서 라신의 문학성을 따지기보다 ‘연극성’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p.195)가 아닌가? 그 연극성은 그러나 그냥 행동의 특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연극은 무엇보다도 언어로 구축된 행동 체계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근본적인 현실이란 […] 말-행동”(p.89), 즉 행동화된 언어인 것이다. 연극의 이름을 통하더라도 비극에서 “행동의 패배는 말의 승리”(뒤비뇨)이다. 비약을 감행한다면, 하나의 사건으로 닫힌 비극은 말의 힘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그 말은 그러니까 비극을 확정하는 말이 아니라 비극의 상처를 여는 말, 비극의 빗장 사이로 무서운 진상을 영원히 엿보게 하는 말이다. 그 말은 말의 전제적인 규정성 그 자체에 반하는 말, “그 어느 표상적 언술로 소진될 수 없는 역동성 그 자체”(p.160)로서의 말이다. 다시 말해 행동-말이다.
여기까지 오면, 필자들의 연극 이해는 60년대의 구조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지난 세기 말의 탈구조주의적 관점으로 어느새 이동하고 있다. 즉 텍스트의 자율성으로부터 텍스트의 열림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도 이 관점의 이동을 보여주는 과정 속에는 분명한 단절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국내 연구자들이 60년대 이후 현대 비평의 전개를 하나의 연속적인 궤적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아니면,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하게 제출한 해석의 단면들이, 저마다 생에 대한 열정으로 속으로 들끓는 채로 지극히 무심한 혹은 새침한 표정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거나.
󰏔 2001, 프랑스고전문학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