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벨멩-노엘의 『충격과 교감』 본문

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벨멩-노엘의 『충격과 교감』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4:06

한국문학비평의 딥 임펙트를 위하여

벨멩-노엘의 충격과 교감이라는 혜성으로부터 퍼져 온 전파의 반향

   

프랑스의 정신분석비평가인 장 벨맹-노엘Jean Bellemin-Noë̈l 파리 8대학 명예교수가 한국문학작품을 읽고 분석하고 해석한 글들을 모아, 충격과 교감(문학과지성사, 2010)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제목에 충격이라는 어사가 포함된 것은 한국문학의 예기치 못했던 비상함에 대한 저자의 느낌을 표현한 것인데, 독자는 그 충격을 표현한 이 글들의 모음이 더 큰 충격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실로 이 책은 희귀한 책이다. 우선 외국 비평가가 한국문학작품을 읽고 이렇게 꼼꼼히 분석한 글들을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접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정신분석비평의 새로운 면모를 본다. 이 면모는 한국문학비평의 정신분석 수용사에서 낯선 것이다. 이 두 가지 희귀함이 맞물려, 이 책은 한국문학에 대한 새로운 느낌과 한국문학비평에 소중한 자문을 제공해 줄 참고문헌의 기능을 해줄 뿐만 아니라, 그 독특성의 자질로써, 한국비평의 한 원소로 넣어도 될 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이의 비평이 한국비평의 대지에 지질이 매우 풍요한 크레이터를 파놓았다고도 할 수 있으니, 한국의 비평가들이 거기서 다양한 광물질들을 채굴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의 충격자체에 대해서는 오늘은 말을 아끼고자 한다.)

한국문학 비평사는 대체로 사회적 문맥에 근거한 판단비평 혹은 해석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호사가적인 관심이 풍문의 차원에서 법석인 것도 사실이다. 그로부터, 고전적 정신분석을 거칠게 수용한 정신분석비평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체로 의사들을 중심으로 수행된 그 정신분석은 작가의 무의식적 고착, 좀 더 좁혀 말하면 유년기적 외상과 그에 따른 정신질환적 특징을 밝히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넓게 보면 샤를르 모롱이 그 범례를 보여주었던 작가의 정신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1990년대 이후 라캉의 정신분석이, 북미와 유럽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 수용면은 대체로 2차 문헌에 의거했는데도 매우 폭넓은 독자들을 확보했는데, 그것은 수용자들이 라캉의 정신분석을 체화하기보다는 라캉이 제공한 개념들을 사회문화분석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이 사태를 앞지르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문학비평에 적용될 때에도 텍스트의 내용을 개념에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라캉이 아무리 시니피앙을 강조했다 해도, 한국의 수용자들에겐 실상 시니피에가 목적인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한국사회의 의미라는 이 거대한 시니피에 말이다.

벨멩-노엘의 정신분석비평은 아주 다른 것이다. 저자 스스로 텍스트분석textanalyse’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의 정신분석비평은 작가의 무의식이든 사회의 문화적 의미이든, 비평 대상 외부의 원천이나 준거점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의 살결을 더듬고 텍스트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 텍스트 자체의 무의식에 주파수를 맞춘 텍스트분석의 동기와 방법론에 대해서는, 책 뒤의 번역자 최애영의 해설, 온 무의식으로 읽기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여기에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입장은 텍스트를 영혼을 가진 육체로 대하고 그의 목소리를 청취하여 독자에게 매개하는 일을 즐거이 떠맡는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기로 하자. 그 매개의 목적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진정한 글쓰기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독자에 의해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p.39)고 저자가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비평적 태도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의 통찰을 상상력이론으로 재구성한 바슐라르를 비롯하여, 텍스트의 지속적 주제와 그 변용을 섬세히 짚어낸 제네바 학파의 장 피에르 리샤르 등의 글들이 한국어로 번역 소개된 바 있었다. 특히 바슐라르의 문학비평은 1970~80년대에 아주 큰 호응을 얻어, 그 비슷이 섬세한 눈길로 한국문학작품들을 해독하려는 일군의 비평가 집단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비평적 태도는 정신분석적이라기보다 현상학적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텍스트의 바깥을 찾으려하지도 않았고, 그 안에 숨은 동굴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령, 바슐라르가 카롱 컴플렉스를 풀이하면서, “죽는다는 것, 그것은 진실로 떠나는 것이다”(물과 꿈L'eau et les rêves)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몽상이 일으키는 세세한 움직임들을 모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운동으로 이해할 때, 혹은 물질의 바탕에는 어떤 모호한 식물이 자란다.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그것들은 이미 그들의 벨벳이고 그들 향기의 제조식이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역설적인 발견은 있어도 표면과 이면의 배반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슐라르가 텍스트의 운동 자체가 텍스트의 풍요를 구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다른 감각은 본래 감각 혹은 범상한 감각에 생기를 부여하고 의미의 고도를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말라르메의 시구 그대로 그의 비평은, “히드라에게 저의 안개를 걷어버리도록 도와주”(배회Divagations)는 것이다.

벨멩-노엘의 텍스트분석적 비평은 그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비유컨대 그의 텍스트에는 안개라기보다는 장막이 끼어 있는 것이다. 뭔가가 다른 것이 있는데, 그 다른 것은 표면의 형태로는 단박에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양적인 의미를 배반하는 것이다. 설혹 장막이 아니라 안개라도 그것은 미스트Mist(Frank Darabont, 2007)의 안개 같은 것이리라. 그렇게 벨멩-노엘의 비평은 언제나 텍스트의 표면을 뚫고 무의식의 내밀한 목소리를 엿들으려고 한다. 그가 보기에 모든 텍스트들은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암흑 저편을 사는 비밀스러운 한 욕망의 비의지적인 표현”(p.160)인 것이다.

그러나 바슐라르와 벨멩-노엘의 소중한 공통점을 더불어 지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공히, 그게 보완적이든 배반적이든, 숨은 욕망 혹은 의지가 스스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동이 텍스트의 표면에 암시의 무늬를 아로새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항상 텍스트의 표면을 섬세히 짚어나가면서 뫼비우스의 띠 모양의 길을 따라 숨은 이면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한국비평이 여전히 배워야 할 이 훌륭한 탐색 자세(자세라고? 그렇다? 여기에서 비평의 방법은 일종의 윤리에 해당하는 것이다)를 되새기면서 다시 그들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다행스럽게도 그 차이를 가늠해 볼만한 좋은 예가 있다. 최인훈의 광장의 마지막 대목(1976년 개정판 이후에 나타나는)이 그 장소다. 낙동강 전선에서 명준과 은혜가 만나고 밀회 끝에 은혜는 아기를 갖는다. 은혜는 전사하지만, 훗날 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쫒아 온 두 마리 갈매기를 은혜와 그의 딸로 인식한다. 그리고 명준은 실종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현의 유명한 해석(사랑의 재확인)이 있다. 김현이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을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못지 않은 섬세한 비평가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바슐라르와의 비교를, 그와의 비교로 대체해도 무방하리라. 김현은 이 대목에 대해서 사랑의 승리라는 해석을 내렸었다.

그는 우선, 둘의 밀회에 바다이미지가 드리워져 있음을 주목하고는,

 

마지막 밀회를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필체가 전부 바다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도 주목을 요하는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명준을 편안하게 은혜어머니바다로 보내기 위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 바다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뜻한다고 보았다.

 

바다는 단순한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몸을 던져 뿌리를 내려야 할 우주의 자궁이다. 이 진술은 작가에게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전의 판본에서 이명준의 죽음은 중립국에서도 별로 보람 있는 삶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죽음이지만, 전집판에서의 이명준의 죽음은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투철하게 깨달은 자의 자기가 사랑한 여자와의 합일, 작자의 표현을 빌리면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여자의 용기에 해당하는 행위인 것이다. [......] 이데올로기 대신에 사랑을 택한 것이다.

 

김현의 해석은 두 가지 현상에 근거해 있다. 첫째, 가정된 사랑의 결실에 근거한 영원성에 대한 깨달음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 상상력에 기대어 그 믿음을 강화한다. “여자의 배를 바다의 표상으로 보는 것은 인류의 오랜 상상력의 소산이다바다는 단순히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몸을 던져 뿌리를 내려야 할 우주의 자궁이다라는 진술, 그리고, “은혜-어머니-바다에서 보이는 연결선들이 그 보편적 상상력의 표상들이다. 이 보편적 상상력에 기대어 사랑의 행위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한 다음, 둘째, 비평가는, 일단 그 행위를 극단적인 부정 쪽으로 던진 다음에 절대적인 긍정 쪽으로 세차게 잡아당기는 방식을 통해, 그 의미에 강렬한 밀도를 부여한다. 그 두 번째 방식이 수행된 자리가,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여자의 용기라는 작가의 진술을 인용해내는 대목이다. 비평가는 작가로부터의 인용이라는 가장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그 밀도에 금강의 옷을 입힌다. 왜 김현의 해석이 그렇게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비밀의 일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벨멩-노엘의 분석은 사뭇 다르다. 그는 우선 은혜가 임신했음을 밝히는 대목을 두고, 그녀를 현실 속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p.76)로 만드는 행위로 보았다. 이 어머니는 김현의 해석에서 언급된 그 어머니’, 은혜와 바다 사이에 끼인 어머니가 아니다. 김현 글의 어머니는 일종의 우주의 자궁을 가진 모신으로서의 어머니이다. 반면 벨멩-노엘이 분석하고 있는 어머니는 구체적인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는 광장에서 결코 묘사되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때때로 불현 듯이 언급돼 그 존재성을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어머니이다. 그것을 벨멩-노엘은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유혹 환상과 그에 대한 회피 사이의 불안으로 읽는다.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명준이 여인[융합-인용자]과 자유[독립],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기를 원”(p.70)하는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이고, 그 사실이 강화되면서, “살고 싶은 욕망과 죽이고 싶은 욕망”(p.77)이 화해불가능 한 채로 서로를 더욱 부추기게 되는 아이러니이다. 그 끝에서 그는 문득 둘을 동시에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고(하나만 포기할 수는 결코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은혜의 임신 소식으로부터 명준의 실종 사이에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벨멩-노엘 분석의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명준의 실종을 행위의 결말, 광장에서 전개된 사건들의 대단원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끝을 맺는 작업이지만, 끝을 맺는 작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p.79)라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무의식의 움직임의 항구성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러나 작품의 결말에서 행위의 결말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의 불안을 달래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그는 분명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메지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로 몸을 내던진 이 남자의 최후의 몸짓이 푸른 하늘 아래, 푸른 파도들 속에서 그 아이와 함께 숨 막히도록 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결정적으로 함구하게 만든다.(p.80)

 

함구라는 어사의 그 기묘한 모호성은 독자를 계속 생각의 맴돌이에 처해 놓는다. 게다가 비평가는 곧바로 행위들을 완성하는 대신에, 수집한다. 이미 그는 소품처럼 등장하는 부채에 착목했던 것인데, 이제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의 끝없는 연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언급의 첫 마디가 이렇다: “이 소설은 부채들을 모아놓은 수집품과 같다.” 그리고 비평가는 다시 독자에게 소설의 세목들로 돌아가, 그 다양성을 즐기라고 권유한다.

비평가는 텍스트의 전체를 구조화하고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포착한 몇 개의 핵심적 모티프들에 대한 기억과 관찰을 텍스트 전체를 통해 끌고 간다. 이것은 비평가가 독자의 인상에 머무르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그랬더라면, 그의 기억과 관찰이 그렇게 끈질기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는 그 끈질긴 기억과 관찰과 궁리로부터, 지금까지의 한국비평이, 그렇게 많은 광장을 썼는 데도 불구하고 결코 생각키우지 못했던 짜릿한 지점들이 마치 태어나자마자 말하고 걷는 신생아처럼 출몰하는 걸 본다. 도대체 광장에서 어머니가 핵심 요소 중의 하나라는 걸 누가 발견한 적이 있던가? ‘갈매기뱃사람들의 갈매기이기 때문에 상징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작품의 문맥상)을 누가 생각해낸 적이 있었던가? 이런 놀라운 발견들이 이 책의 도처에, 그러니까 그가 다룬 이인성, 정영문, 김경욱, 김영하 등의 소설들, 한국의 민담들의 곳곳에, 자리한다. 마치 비평가는 한국문학이 캐내고 캐내도 고갈되지 않는 보물동산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가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들이 끝끝내 자신 앞에 드리우고 있는 어둠, 즉 그가 한국말을 모른다는 사실이 총제적인 설명을 주저하게끔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말을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불역본에 기대어 이렇게 정치한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비평가가 평소에 정보의 정확성과 논리적 엄정성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단련해 왔는가를 짐작케 한다. 오직 정확성과 엄정성에 대한 의지만이 번역본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공백을 채울 상상력이라는 화살로 하여금 진실의 과녁을 맞힐 수 있도록 해줄 시위와 그 당기는 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나는 벨멩-노엘 교수와 가졌던 짧지만 빈번했던 사적인 만남들을 통해 그가 그러한 엄격성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프랑스 문학을 비롯한 문학과 철학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대화에 제대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거리에 대해서 뭔가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했다. 제목만 알아서는 물론 택도 없었고 줄거리만 알아서도 안 되었으며, 스스로 겪은 독서체험과 사유의 굴곡과 그로부터 파생된 나름의 결론들을 꺼내 놓아야만 했다. 멋진 표현이라고 외우고 있는 걸 자랑이라고 인용했다가 설명을 위해 원본을 다시 뒤진 적도 있었다.

개인적인 고백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런 엄격성에 대한 훈련을 예전에 한 번 받은 적이 있다. 대학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던, 지금 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기원 선배가 그 훈련 조교였다. 그이는 어떤 말에 대해서든 정확한 근거와 그 논리적 타당성을 물었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고, 제대로 말하기 위해 많은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벨멩-노엘 교수에게서 다시 한 번 그 학습을 받게 된 것이다. 마치 재교육을 받듯이. 나는 아직 그이처럼 그러한 엄격성을 생활화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계속 뜨끔해 하며.

나는 최근 브느아 페테르Benoît PEETERS가 쓴 데리다 전기(Flammarion, 2010)를 읽다가 벨멩-노엘 교수가 데리다와 루이 르 그랑학교에서 고등사범입시준비생으로 가장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두 사람이 배우고 익히고 나눈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그들의 지적 염결성은 아마 그때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한국의 입시 제도와 풍토에 생각이 미치고, 다시 한 번 내 마음이 처연해진다. 청소년 시절에 갖추어 놓아야만 하는 걸 우리는 터럭만큼의 엄두도 못내고 있는 것이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쓴 날: 2011.2.22.; 발표: 문학과사회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