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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의 미로 혹은 레고 -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자의식의 미로 혹은 레고 -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

비평쟁이 괴리 2023. 9. 26. 13:40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8회 독회의 결과물로서의 독후감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문학동네, 2023.07)은 코믹인가? 한숨인가? 실상 여기엔 진부하고 데데한 현실만이 있다. 미래 세계인데 인간이 상상하던 환상의 미래도 음울한 디스토피아도 아니라 그냥 재미없는 현재의 연장선상이다. 게다가 그 연장은 한이 없다. 현재의 진부함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게 작가의 메시지다. 
문제는 이 낡음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 고도로 민감하다는 점. 구병모적 글쓰기의 특징은 사물들에 대한 모든 순간 모든 지점에서의 서걱거리는 느낌이다. 화자는 그 옆에 놓인 것들, 그가 만나는 것들, 스쳐 지나는 것들 모두를 지나치게 느낀다. 게다가 그런 느낌 자체에 대한 자의식도 배좁게 다붙은 가시들 모양으로 시시각각 돋아난다.
이 느낌과 자의식은 조화가 아니라 어긋남의 그것들이다. 따라서 삶의 진부함에 대한 불편한 마음들이 끊임없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그 불편한 마음을 자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또한 개입하기 때문이다. “증오보다는 연민과 허무”의 시선이다. 
이 연민과 허무의 시선은 현실보다 높은 위치에서 보내는 시선이다. 화자는 현실과의 어긋남 뿐만 아니라 그 어긋남에 대한 자신의 짜증까지도 희롱을 한다. 어긋남과 짜증이 과잉되면 히스테리를 유발하는데, 그에 대한 희롱은 히스테리의 반대 방향이다. 
히스테리는 장래에 대한 공상적 기대가 좌절되면서 일어나는 관념적 망상의 표출이다. 그에 대한 희롱은 그 망상을 차단하고 현실을 똑바로 견디라고 얼굴을 돌려 세운다. 이것이 구병모 소설의 희극이 보여주는 건강함이다. 히스테리가 “짓이겨진 장미”라면, 희롱은 그 장미의 파손을 명확히 비추는 거울이다. 이건 ‘일그러진 장미’의 ‘문명판 버전’이다. 문명판이라는 것은 화자의 시선이 그 일그러짐을 함께 겪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짓이겨진 장미를 객관적으로 비추면 희롱의 눈길이 스스로 함몰한다. 자기 만족 속에 빠지고 그냥 뜻없이 허무해진다. 구병모의 거울은 허무를 소득있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일그러진다. 그래서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이 뒤섞이고 사적 실랑이들과 공적 다툼이 서로의 다름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식으로 뒤엉킨다. 그래서 진부함이 진통을 하고 데데함이 건방져지면서 데퉁스러운 형상들을 띤다. 
구병모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이렇게 삶의 진부함을 도막도막 들어 삶의 야릇한 실물들로 재생시키는 데에 있다. 다만 이 실물들의 조립도 한이 없다. 그것마저 진부해질 것인가? 그러지 않을 방법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