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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진화 과정에 대한 철학적 물음 -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생명의 진화 과정에 대한 철학적 물음 -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비평쟁이 괴리 2023. 8. 29. 08:59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여덟 번 째 독회에 대한 심사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과학은 사이파이Syfy’(과학소설)에게 있어서 필요조건이라기보다는 충분조건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의 과학소설들은 과학적 지식과 환상적 요소들을 뒤섞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정향은 기본적으로 상극이다. 판타지가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향수에 기초해 있다면 과학소설은 미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김보영의 소설, 종의 기원담(아작, 2023.06)은 정통 사이파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인류세를 넘어 먼 미래의 로봇이, 로봇의 시각으로, 로봇의 방식으로, 로봇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세상을 주도하는 로봇세를 다룸으로써 인간너머의 존재 양식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이 소개하는 기본 배경인 로봇세는, 그 삶의 양상에 있어서, 인류세와 다르지 않다. 먼 미래의 로봇들은 오늘의 인류와 거의 똑같은 사유과 감정을 가지고 있고(가령, 이런 구절을 보라:

 

세실이 자상하게 물었다. 그 말소리가 너무나 평온하고 친근해서 전류가 막힐 것 같았다[p.165]) ,

 

이기적 본능과 인간 관계, 정치적 갈등들은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심지어 로봇들은 종교에까지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집착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로봇세의 존재 양식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인류세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인류와 로봇의 심각한 차이가 있긴 하다. 인간은 유기생명이고 로봇은 조립 생명이다.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 다양한 방식의 노출을 행한다. 반면 로봇은 기관부를 여는 게 일반적이다. 유기생명은 그 어떤 규칙도 적용할 수 없는 구조”(p.157)라면 로봇은 규칙들의 집합 체계이다.

희한하게도 로봇들에게 저 규칙 부재의 인간적 생명성은 신비의 블랙홀이 된다. 일단 그것에 홀리면, 로봇은 기꺼이 인간을 숭앙하고 경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향은 무자비에게 감염적이다. “로봇은 왜 창조론에 매혹되는가라는 모두(冒頭)의 명제는 그렇게 해서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기저 관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유기생명학을 창시하고 그로부터 인간을 만드는 기제를 결정적으로 제공했던 주인공은 인간을 박멸하는 데 주력하고 대체로 성공한다. ‘생명의 살상은 합당한가라는 최후의 의혹을 남겨놓은 채로.

왜 이러는가? 주인공 케이의 생각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간 숭배는 로봇을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로봇의 자아가 망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까닭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케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확신은 인간은 오염으로 뒤덮인 생물, 오염을 먹고 사는 생물. 오염을 필요로 하고, 오염을 퍼트리는 생물이라서 결국 지구를 훼손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의 인간 박멸 사업의 대의로 작용한다.

이 논리는 매우 불투명하고 작품 전체의 사건들의 맥락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 같다. 그것은 우선 정해(精解)가 가능한 알고리즘을 통해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하는 완벽한 개체에 대한 욕망의 위험성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작품 속의 로봇이 그런 개체를 열망한다면, 이 안의 로봇이 실제의 인간과 유사한 사유정념을 구사한다는 점에 비추어져, 완벽한 개체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로봇의 자아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추론을 거쳐 모든 생명의 자아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논법이 구축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로봇의 심성이 자가당착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귀띰한다. 왜냐하면 원래 자아를 지키려는 의지는 노예화에 대한 거부인데, 그런 정념의 최종적인 귀착지는 완벽한 개체(인간)에 대한 숭배, 즉 자기 노예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로봇이 매번 로봇적 삶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매순간, 가령

 

유기생물학에서는 매순간 변화하는 개체를 한 개체로 인식하기 위한 방정식을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는 줄 압니다만, 애초에 접근 방향이 틀렸어요. 유기생물은 변화하는 파동의 연결성과 관계성 어딘가에 잠시 머무는 환상입니다.”(p.303)

 

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숨은 힘으로 작용한다. 이 감추어진 논리는 이 작품을 인간과 로봇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의 진화적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 속으로 몰아 넣는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이 철학적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세를 지탱해 온 사회진화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성찰에 속한다. 인류를 지적 생명으로 진화시키고 지구의 지배자이자 우주의 정복자로까지 발전시켜 온 그 논리는 또한 지구와 생명세계의 근본적인 절멸을 초래한 주범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미래가 진정 지속가능한 생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제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저 유명한 명제와 아는 선의 종족이고 비아는 악의 가능성을 함유한다는 사회진화론의 기본 설정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서 궁극적으로 인류세 너머의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절박하게 요청한다. 그런데 어떻게? 작가는 후기에서 그 점을 상생이라는 용어로 적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직 논리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사유의 부재는 이 작품이 안고 있는 약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로봇류가 지배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로봇의 분류학은 있으나 로봇의 진화학이 없다. 무기생명의 등장(10만년 전)에 대한 설명은 있으나, 즉 어떻게 로봇이 지구의 지배자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가 없다. 또한 인간의 멸종사도 그 조건만 제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과정이 망각의 늪에 빠져 있다.(지구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면 인간이 그대로 멸종한다는 전개는 자연스러운가?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보다는 훨씬 고등한 사연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유기생물과 무기생명 간의 격렬한 투쟁의 기간이 가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로봇의 인간 신앙이 제시되어 있을 뿐, 작품 내적으로는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앞에서 보았듯, 이는 로봇-인간의 상호 참조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으로 의혹을 제기할 만한 부분들도 상당수 있다. 가령 고도로 진화한 종으로서의 로봇류의 삶이라면, 그 종의 기계적 존재 양식도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타당할 듯하나, 작품 속의 로봇은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고철들처럼, 혹은 지구가 멸망한 이후 관리체제가 무너진 세계의 만달로리안들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묘사는 적절한 것인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작가가 실제 정밀한 과학적 지식을 작품에 원용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수록, 이 로봇 형태 현상학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이 소설을 어떤 문제적 로봇의 인간 사랑의 광태로 읽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렇게 읽는 게 독서의 박진감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경우에도 ?’라는 질문은 여전히 독자를 괴롭힌다. 왜 로봇은 인간을 숭앙해야 하나? 먼 미래의 과학이 생명의 유기적 형식에 그렇게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근거는 있는가? 혹은 조립 생명은 유기 생명과 그렇게 배치되는 것일까? 물리와 화학, 그리고 생물학이 하나로 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 과학의 추세에 비추면, 이런 발상은 반 걸음 뒤쳐진 과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