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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영원한 유산』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

비평쟁이 괴리 2021. 3. 30. 06:27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에 대한 조선일보 지면 심사평의 원본이다. '원본'이라 함은 원래의 제목과 분량 때문에 줄여야 했던 부분을 되살렸다는 뜻이다. 지면으로 발표된 원고는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친일파의 후손이 저지르는 웃픈 희극을 통해 한국인의 정신적 부식 상태를 천착하는 역사소설

미래를 상상하는 과학소설과 과거를 채굴하는 역사소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번역의 중요성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무얼 무엇으로 번역하는가? 바로 과거 혹은 미래의 언어를 현재의 언어로 옮기는 것을 가리킨다. 똑같은 한글이지만 1960년대의 한글과 2020년대의 한글 사이에 놓인 소통의 강이 마냥 시원하게 흐르는 것은 아니다. 60년 전의 우리를 알려면 그때의 사회와 사람들과 문화를 알아야 한다. 특히 통계가 변죽만 보여주기 일쑤인 그 시대의 정신상태와 행동 양식과 마음 쓰는 꼴과 말하는 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공통점과 차이를 잘 분별하여, 그 긴장을 조율하는 것이 번역의 기술이다. 좋은 번역은 낯설게 느끼게 하면서도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가진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과거를 탐구하고 싶어서 애닳도록 매혹적이고도 생소한 비밀처럼 만드는 데서 역사 소설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영원한 유산은 성공하고 있다. 한일회담 개시 무렵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분명 우리의 옛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게 행동하고 특이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한데 그 낯섦이 신기해서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우리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원 모습임을 깨닫고 한편으로 당황하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삶의 굴곡 전체를 반성의 다듬이판 위로 올려 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의 치밀한 조사가 성과의 가장 큰 원천이리라 하지만 그에 더해서 현상 밑의 심부를 꿰뚫어보는 통찰이 눈앞의 사건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이제 막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한국은 여전히 강대국이 조물락거리는 상태에 놓여 있는데, 당시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들어서 있던,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벽수산장을 둘러싸고 그 후손이 벌이는 작태는 한국 사회를 어릿광대들의 희극판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지는 친일파를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행태에 강렬히 분노하는 독자의 눈길을 돌려 그 뒤에 도사린 한국 상류 계층의 정신적 부식(腐蝕) 상태를 들여다보길 주문한다. 거기에 이 역사 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저 왜긋한 후손은 우리 자신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 우리는 왜, 어떻게 저이의 야당스런 행동에 휘둘리는가? 오늘의 한국인은 우리 안에 도사린 악도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달의 제단(2004)에서 한국 전통 사회의 관습적 무지와 그로부터 발원한 폭력적 상황을 집요하게 파헤쳤던 심윤경은 오늘의 작품에서도 다시 한번 한국인의 무의식을 천공하여, 그 고름을 짜내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인의 의식의 진화에 한 줌의 여력을 보태는 일이다. 일독을 권한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 아래 글은 위 작품에 대한 개인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었던 벽수산장을 둘러싸고, 거의 50년이 지나 그 집을 공공유산으로 만들려고 한 윤덕영의 딸 윤원섭의 꿍꿍이 실행과 그의 허위를 옆에서 지켜본 해동의 고뇌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소재가 이색적이면서도, 친일이라는 죄악을 너머 한국 상류계층 일반의 정신적 환몽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어서 생각의 두께가 꽤 실하다. 그런 허위에 반응하는 태도들의 다양함과 그 중심에 놓인 해동의 우유부단하면서도 정직한 고민이 저 환몽과 대비되면서 독자를 생각의 깊은 골짜기로 유도한다. 이 모든 과정은 근대 이후 한국인의 삶 전체에 대한 반성적 질문을 이룬다. 요컨대 제목 영원한 유산의 실질적인 의미는 영원한 부채이다. 한국인 모두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은 인물들의 행동이 특이하면서도(특히, ‘윤원섭의 경우) 자연스럽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디테일들이 정확하고 주밀하게 묘사되었다는 바탕에 힘을 얻고 있다. 더욱이 어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어떤 평론가는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S/F를 다룬 평론에서, S/F역사소설의 공통점이 번역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참된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그 시대의 언어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관건이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60년대 한국인의 거친 감정을 아주 생생하게 전달한다. 요즘의 한국문화(트로트가 지배하는 노래 문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예능 프로 모든 곳에 해당한다)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한국인들의 감정 표현은 꽤 적나라한 편인데, 반세기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원색적이었다는 것은 필자 스스로가 살아 온 시절을 뒤돌아보면서 짠히 떠올리게 되는 모습이다. 앙트완 베르망Antoin Berman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은 대상 작품의 세계를 이국의 풍경답게 낯설게 느끼게 하면서도 이해와 공감을 향한 맹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끔 하는 번역이다.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원한 유산50년전의 한국을 실감나게 재현하면서 낯설게 한다. 그런데 그 낯선 모습이 우리 자신의 과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엔 저 영원한 부채가 청산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인가? 그런 떨떠름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질문 앞에 독자를 세우는 게 이 작품의 최종적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소하지만 오늘날의 태도와 어법이 무의식적으로 침투해 들어간 대목들이 있다. 좀 더 꼼꼼히 교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원섭의 행태에 질리던 해동이 어느 순간, 그를 추궁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이후의 원섭의 해동에 대한 태도 및 그 둘의 관계에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그럴듯하지 못하다. 원섭의 반대편에 진형과 그 가족의 태도를 놓음으로써 대안적 삶에 대한 암시를 깔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묘사 역시 충분치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