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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비평쟁이 괴리 2021. 4. 19. 18:39

아래 글은 4월 동인 독회에서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글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이 소설집을 돋보이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생각의 촘촘한 전개이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을 소재로 취해서, 그것을 내밀한 사적인 경험으로 치환하여 성찰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게 이 소설집 작품들의 기본 작동형인데, 한편으론 개인의 고유한 삶을 각별히 고려하는 태도에 의해, 오늘날의 사적 경향과 맞닿아 있으나,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공적 공간에 투영하지 않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연관성을 세밀하게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경향으로부터 한 단계 진화한 국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 태도에 의해서 공공의 문제와 사적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주 풍요한 탐색이 이루어진다. 이때 사적 삶은 공적 문제의 전형으로서가 아니라 구체화된 질문의 계기가 되고, 공적 문제는 사적 삶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사적 삶들이 하나로 모여서 경쟁하는 토론의 자리가 된다.

모든 인물들의 각각의 태도와 행동은 이 질문과 토론의 실행으로 나타나서, 그것들 사이에는 공감거리감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인물들이 느끼는 이 두 가지 감각이 독자에게 전이되어, 또 다른 양태(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의 감각적 반응을 자극한다.

또한 이 연관성을 온당하게 탐색하기 위해서는 전방위적 넓이와 다층적 깊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꼼꼼히 따져야 할 터인데, 그 점에서 이 소설가의 펜은 아주 주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모두(冒頭)에서 말한 생각의 촘촘한 전개가 바로 그 움직임을 가리킨다. 가령 낙태죄를 반대하는 모임에 참석한 한 인물이 임신중지법을 주장하며 쓴 초고에 대한 화자의 다음과 같은 고민을 보자.

 

희진 언니는 자궁외 임신 여부만 의료인들이 감별 한다면 미페프리스톤과 식도염 치료제로 쓰이는 미소프로스톨의 병합요법이 최선의 임신중지법임을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언니의 초고에는 이런 내용과 함께 약물적 임신중지법이 알려져야 관행적으로 시행되어온 소파술에 따르는 공포 이미지를 상쇄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안정성이 입증된 약물인 만큼 언니의 의견에 이견을 달 이유는 없었어요. 그럼에도 나는 언니의 초고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편한, 그래서 방어적으로 읽히는 문장들 때문이었죠. 이를테면 언니는 “이렇게 안전한 약물적 임신중지법은 차기 임신에 영향을 주지 않아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고 쓰기도 했고, “어떤 여성도 임신중지를 결코 쉽게 결정하지 않”는다며 “여성 자신의 삶과, 가족과, 무엇 보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고심 끝에” 결정한다고 적기도 했지요. 다른 구성원들도 “낙태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의 죄를 폐지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식의 표현을 언니처럼 자주 사용했는데 나는 이런 수사들이 못내 불편했습니다.

 

여기에는 정당한(하다고 간주된) 행동에 대해서조차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정략적 태도들을 의심하고 점검하는 꼼꼼함이 있다. 이런 주의가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이 소설들은 행동과 태도의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한 모든 경우의 수들을 하나하나 검토의 대상에 올린다. 이 검토를 통해서 앞에서 말한 사적인 삶이 구체적 질문의 사례가 되고, 공적인 것이 토론 속에 놓이는 그런 담론적 공간이 형성된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소설은 개인의 실존적 모습들을 조명한다는 표방 하에 탈사회적인 사건들을 자유롭게 주유했고, 혹은 사회적 문제에 접근한 작품들은 선악을 미리 결정한 상태에서 사건을 다루기가 일쑤였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 소설의 진화를 지체시킨 큰 요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제 개인과 사회가 다시 소통하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는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적 삶이 그 자체로서 사회적 공의를 형성하기 위한 선택으로 작동하게 된 사회적 변화에 연결된다. 실로 이것이 개인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풀이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의미에 해당하다. 사회는 인연의 공동체가 아니라 의견들의 합의체인 것이다.

이현석은 그 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대형 신인의 등장을 동시에 알린다. 그의 갈 길을 주목하자. 다만 소설적으로 아직 구성(plot)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음을 부기해두고자 한다.

곁가지 이야기.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젊은 세대는 모든 태도와 행동들을 단자(單子)들의 무한 경쟁의 표출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그것이 삶의 실상일 것이다. 다만 실상의 움직임은 언제나 공동선을 향한 이상을 전제로 한다. 실상과 이상의 거리를 유념한다면, 오늘의 소설에서 타협과 상호 이해를 통한 생각틀의 비상보다 올바른 생각의 가림을 위한 필사적인 탐색이 강렬하게 조명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심중히 성찰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