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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리는 문학 존재론-송상일의 『국가와 황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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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리는 문학 존재론-송상일의 『국가와 황홀』

비평쟁이 괴리 2023. 3. 4. 08:25

                                                                                                                                      

                                                                                     

                                                                                   나의 시 한 행은 나의 피 한 방울
                                                                                           -장 리스타트(Jean Ristat)

에밀 시오랑은 말한다:“인간들은 왜 피 흘리며 씌어진 작품들 앞에서 감탄을 아끼지 않는가?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을 면제해주거나 혹은 면제해준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 뒤로 피와 눈물을 보고 싶어한다. 군중이 외치는 감탄사는 사디즘의 발로이다.”(『절망의 끝에서』, 김정숙 역, 도서출판 강, 1997, p.143)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말해, 한국의 독자들은, 피 흘린 작품 앞에서 감동을 유보할 수 없다. 우리에게 그런 작품은 너무나 희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면제받는 환상을 품기에 앞서 고통 그 자체에 직면해 본 경험을 만나기 힘들다. 물론 글들은 항상 민족의 고통, 타인의 고통,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고통 그 자체는, 글이 언어의 집합인 한, 언어에만 있다. 언어의 고통에 피흘린 책은 우리에게 같은 양의 고통을 요구한다. 희귀한 체험이기 때문에 우선 유혹하고, 다음, 고통스럽게 겪게 하고, 그리고 싸우게 한다. 고통 없이 양산된 작품들과, 내용의 고통을 곧바로 삶의 의미 체계로 이관시키는 제도에 대하여. 그 싸움은 살이 찢기는 고통이고 세상이 파열하는 황홀이다. 언어의 고통은 지독한 고통-황홀이다.
여기에 피를 짜내며 쓴 텍스트가 있다. 송상일의 『국가와 황홀』 (문학과지성사, 2001)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문학의 고통-황홀에 대해 고통-황홀의 언어로 말한다. 이 고통 속에는 국가와 황홀 사이의 처절한 사투가 정면화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들의 집대성 체계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식의 목적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산되고 유지되고 연장된다. 그렇게 해서 국가를 이룬다. 존재는 이미 의미가 부여된, 다시 말해, 의미에게 잡아먹힌 먹이이다. 플라톤 이래 끊임없이 확장되어 온 이 국가의 기획에 맞서 저자는 황홀을 대립시킨다. 황홀은 무화하는 힘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무화하는 힘이기 때문에 황홀의 양태는 고통이다. 무에의 의지는 죽음 충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죽음 충동은 순수한 살의 활동, 어떤 의미에도 자신을 주어버리지 않는 기표들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만일 국가가 황홀에 빠지면,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부른다.”
이 고통-황홀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생산적 문학론의 온갖 종류들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시학을 세운다. 그런데 명명은 어떻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저자의 시학뿐만 아니라 문학도 언어로 이루어진 한 명명한다. 이것 또한 국가에 대한 욕망이 없을 것인가? 무에의 의지를 명명하는 일이 가능한가? 저자의 외줄 곡예가 번쩍이는 것은 이 지점부터다. 우선 그 곡예의 핵심에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배려는 과대하거나 과소하다”는 날카로운 잠언이 있다. 존재는 항상 지탱되고 확장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재빨리,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적으로, 의미에 쓰여진다. 그러니까 존재는 의미의 먹이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존재는 “부재하거나 초과적으로 있다.” 저자가 인식과 만남을 가르고, 존재자와 존재를 분리시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이다. 인식에게 순식간에 먹히기 이전에 만남의 사건이 있고, 모든 존재는 ‘우선 대개’ 존재자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존재자가 아닌 것은 무다. 명명은 이 나타나지 않는 존재를 포지한다. 이제 명명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가리키는 몸짓이 된다. 그 몸짓을 통해서 “천진난만한 존재의 속살”이 드러난다. 이 존재는 존재자가 부정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존재자의 부정이 무라면, 존재는 무로부터 태어난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비유를 뒤집어 그 실상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그 묘사의 마무리 말은 이렇다:“무는 존재가 들락거리는 동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존재는 존재가 들락거리는 구멍이다. 무가 존재자의 노예 되기를 그치는 순간 무/존재의 이분법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가리키는 몸짓인 언어는 그렇다면 그때 문법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다. 문법은 의미론의 항목, 국가의 소유물이다. 의미론에 포획당하지 않고 국가의 소유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언어는 일회적이고 불완전하며 말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소진하는 말, 찢긴 언어, 방언이어야 한다.
문학의 언어-존재는 피 흘린다. 살이 찢기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가 들락거리는 구멍이니까 말이다. 이 책도 그 구멍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논증의 형식을 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논증이 아니다. 이 책의 절차는 “논리적이고 방법적이지만”, 논리적이고 방법적으로 ‘증명’하지 않고 ‘실존’한다. 비평은 문학의 해설가가 아니라 문학의 수행동사이다.
󰏔 2001 여름, 문학과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