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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거울 ․ 3 무명의 시간들이 익사해 간 거울 속에는 분홍으로 가려 있는 추억의 창도 있지만 빗질을 하면 할수록 헝클리는 오늘이 있다 그러나, 아침마다 잠이 든 넋을 위해 누군가 힘껏 쳐 줄 종소릴 기다리며 우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야 한다. 비가 오고 서리가 오고 국화꽃이 길을 열고 우리 맞는 계절은 늘 이렇게 조화로운데 거울은 무슨 음모에 또 가슴을 죄는구나 (이우걸 시집, 『사전을 뒤적이며』, 동학사, 1996) 보통 독자들은 무심코 지나가겠지만 이 작품은 시조다. 시조하면 무위 자연과 음풍 농월을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실천 탓이다. 그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시조란 곧 생활 속에서 피어오르는 시절가요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조인들이 노력하고 있다. 이우걸도 그 중 한 ..
한 번 만의 꽃 대나무는 평생 좀체로 꽃을 피우는 법 없지만 만에 하나 동지 섣달 꽃 본 듯, 꽃을 한 번 피우기라도 할 양이면 온 대밭의 대나무마다 일제히 희대(稀代)의 소문처럼 꽃들 피어나지만, 그 줄기와 잎은 차츰 마르고 시들어 결국 죽고 만다고 한다. 꿈같은 개화의 한 순간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대나무, 오오 눈부신 자멸(自滅)의 꽃 (이수익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시와시학사, 2000) 새해에는 어떻든 소망의 시를 읽고 싶다. 그러나 소망은 얼마나 자주 배반당하는가. 삶은 늘 기대 저편에서 처연히 자빠져 있거나 보기 흉하게 아득바득거리고 있다. 헛산 인생의 잡동사니들로 가득찬 넝마 자루의 꼴이거나, 증오와 분노로 투닥투닥대는 티검불 더버기의 형상이거나. 하지만 생각..
줄탁 저녁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 2』(1986~1992), 도서출판 솔, 1993) 해가 저물고 있다. 유한자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세모(歲暮)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순환하는 자연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죽음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진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사람과 자연의 두 눈을 포개어 죽음의 비애와 신생의 희열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감정을 증폭시켜왔다. 비애가 클수록 희열은 더욱 차오른다. 김지하의 「줄탁」도 그러한 재생 신화의 한 자락을 펼쳐 보인다. 그러..
꽃잎 2 꽃병의 물을 갈아주다가 신종인지 송이가 아주 작은 장미 꽃잎이 몇 개 바닥에 떨어졌다 저 선홍색 꽃잎들! 시멘트 바닥이 홀연히 떠오른다, 무가내하 떠오르고 떠오른다. 또한 방은 금방 궁궐이 되느니, 꽃잎 하나 제왕 하나 꽃잎 둘 제왕 둘, 길은 뜨고, 건물도 뜨고 한 제왕이 떠오른다. ( 『정현종 시 전집』 제 2권, 문학과지성사, 1999) 정현종의 시가 갈수록 신명으로 흥청거린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신명은 생명에 대한 경탄이 몸으로 옮겨 붙어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으로 추는 춤과도 같은 것이다. 저 무가내하(막무가내)로 추는 말의 춤, 그게 경이롭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산업 문명사회가 발전하면서 세상은 얼마나 딱딱해졌으며 인간들은 얼마나 각박해졌던가. 그걸 시인이 모를 리 없다...
새 머리채를 잡고 자반뒤집기를 하던 시누이도 울고 땅문서 갖고 줄행랑을 놓던 서숙질도 운다 들뜨게도 하고 눈물깨나 짜게 만들던 그 사내도 울고 부정한 어머니가 미워 외면하고 살던 자식도 운다 고생고생한 언니 가엾어 동생도 울고 그 딸도 운다 새도 제 울음 타고 비로소 하늘을 높이 날고 곡소리 타고 맹인 저 세상 수월히 간다지만 얼마나 지겨우랴 내 이모 또 이 울음 타고 저승길 가자니 진 데 마른 데 같이 내디디며 평생을 살아왔으니 저승길 또한 그런가보다 입술 새려 물겠지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작과비평사, 1998) 「새」에는 3중의 소리가 포개져 있다. 하나는 망인과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다. 싸웠던 사람도, 돈 떼먹은 사람도, 안달나게 했던 사람도 운다. 미워했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