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현종의 「꽃잎 2」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정현종의 「꽃잎 2」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41

꽃잎 2

 

꽃병의 물을 갈아주다가

신종인지 송이가 아주 작은 장미

꽃잎이 몇 개 바닥에 떨어졌다

저 선홍색 꽃잎들!

시멘트 바닥이 홀연히

떠오른다, 무가내하

떠오르고 떠오른다.

또한 방은 금방

궁궐이 되느니,

꽃잎 하나 제왕 하나

꽃잎 둘 제왕 둘,

길은 뜨고, 건물도 뜨고

한 제왕이 떠오른다.

( 정현종 시 전집2, 문학과지성사, 1999)

 

정현종의 시가 갈수록 신명으로 흥청거린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신명은 생명에 대한 경탄이 몸으로 옮겨 붙어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으로 추는 춤과도 같은 것이다. 저 무가내하(막무가내)로 추는 말의 춤, 그게 경이롭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산업 문명사회가 발전하면서 세상은 얼마나 딱딱해졌으며 인간들은 얼마나 각박해졌던가. 그걸 시인이 모를 리 없다. 저 꽃잎이 떨어진 곳이 시멘트 바닥이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문명의 난민이고 아스팔트의 지옥도시 생활에 대한 기막힌 은유인 것이다(기껏 횟가루와 모래의 합성물에 불과한 것이 우리를 이리도 짓누르다니!) 그런데 문득 시인은 본다. 꽃잎 몇 개가 그 바닥에 떨어진 것을. 그것들은 썩 작아서 마치 시멘트 바닥에 선홍색의 물감이 몇 방울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그러니까 신비한) 꽃잎들은 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시멘트 바닥을 위협하지 않는다. 맞서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덕분으로 그것들은 문득 시멘트 바닥 속에 스며 버렸다. 시멘트 바닥은 어느새 빨강 꽃잎들의 미래형이 되어 버렸다. 꽃잎들이란 무릇 우리의 머리 속에서 언제나 춤을 추는 법, 꽃잎이 춤추니 덩달아 시멘트 바닥도 홀연히 떠오른다.” 도시의 방은 어느새 궁궐이 된다. 그처럼, 시는 그 미약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세상 전체를 시로 물들인다. 그게 정현종의 신명의 시론이다. (쓴날: 2001.11.29, 발표: 주간조선 1682, 2001.12.13)